기획특집
[덕원의 순교자들](33) 루치우스 로트 신부
교황대사 비서직 대신 선교사의 길 택한 주님의 종
2014. 04. 27발행 [12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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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대사 비서직 대신 선교사의 길 택한 주님의 종

루치우스 로트 신부(Lucius  Roth)

▲출생: 1890년 2월 19일, 독일 뷔르츠부르크 바이흐퉁엔

▲세례명: 콘라드

▲한국명: 홍태화(洪泰華)

▲첫서원: 1910년 10월 16일

▲종신서원: 1913년 10월 16일

▲사제 수품: 1914년 7월 5일

▲한국 파견: 1924년 8월 17일

▲소임: 육도포ㆍ원산주교좌본당 주임, 덕원수도원 원장 겸 부감목, 덕원신학교 교수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9일, 덕원수도원

▲선종 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3일/4일, 평양인민교화소    

▲ 1921년 에우제니오 파체리 대주교(훗날 비오 12세 교황) 비서 시절의 젊은 로트 신부.
▲ 평양인민교화소에서 쓴 로트 신부의 비밀편지.

 
루치우스 로트 신부는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에게서 수도원과 선교 사업의 모든 책임을 떠맡아 운영한 ‘덕원수도원의 맏아들’이었다. 수도원에서 소임을 분배할 때마다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이 가장 힘든 일을 맡아 한 그는 육도포ㆍ원산주교좌본당ㆍ수도원장ㆍ원산대목구 부감목ㆍ신학교 교수ㆍ원산수녀원 고해신부ㆍ새 선교사들의 한국어 교사 등 셀 수 없는 과중한 업무를 맡아서 했다.

로트 신부는 1890년 2월 19일 독일 뷔르츠부르크교구 베르머릭스하우젠 바이흐퉁엔에서 아버지 이시도로 로트와 어머니 가타리나 라이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콘라드. 9남매 가운데 누이 둘이 툿찡 포교 베네딕도회 수녀원에 입회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했다.

신앙심과 재능을 본 본당 신부의 추천으로 소신학교인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선교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909년 9월 ‘루치우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을 시작, 1910년 10월 16일 첫서원을 했다. 첫서원 후 로마 성 안셀모대학으로 유학 간 그는 1913년 10월 16일 종신서원을, 1914년 7월 5일 사제품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여파로 그는 독일인이란 이유로 로마에서 추방돼 1920년에 가서야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제품을 받은 후 상트 오틸리엔 선교신학교에서 지리와 영어ㆍ이탈리아어 등을 가르친 그는 1921년 2월부터 1923년 1월까지 뮌헨 주재 교황대사 에우제니오 파첼리 대주교의 비서 및 보좌관으로 일했다. 훗날 비오 12세 교황(재위 1939~1958)으로 즉위한 파첼리 대주교는 교황이 된 후에도 로트 신부의 노력과 정확함, 능력을 잊지 못해 안부를 챙길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 교황대사 비서직을 그만둔 그는 1924년 8월 17일 한국으로 파견돼 원산주교좌 본당과 육도포본당 선교기지 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는 본당 사목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처지에 대해 푸념하지 않았다. 공소 방문길에 눈보라로 탈진해 얼어 죽기 직전 극적으로 구출돼도, 독감으로 나흘간 의식이 없어도, 생활비가 없어 우유만 먹고 살아도, 마적의 습격을 받고 늪지대에 빠져도 단 한 번도 비관하거나 비난한 적이 없었다.

로트 신부는 자신에 대해선 엄했지만, 신자들에겐 자상한 목자였다. 그는 생활비를 아껴 신자들이 겨울에 성당 맨바닥에 앉지 않도록 마루 판자를 깔았다. 또 시골 공소에서 주일 미사에 참례하고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성당으로 와야 하는데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할 수 없다며 자신이 직접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성사를 줬다. 로트 신부의 이런 인간적 면은 평양인민교화소 수감 때도 많은 간수에게 감화를 줘, 한 간수는 교화소 담장 너머로 비밀편지를 전해주고 훗날 세례를 받기도 했다.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쁜 일상에도 그는 한국인 신자들과 새 독일인 선교사를 위해 우리말 「미사경본」을 펴냈다. 그리고 「연습 문제가 포함된 독ㆍ한 문법」, 「아이들의 미사 고해성사 안내」, 한국어와 일본어로 된 「덕원수도원과 성당 안내」, 평수사용 우리말 성무일도서 「수사통경기도」 등을 번역 출간했다. 덕원수도원 연대기 작성자는 로트 신부의 책 출간을 반기며 “이로써 한국어 공부가 편하고 쉬워졌으니 수도자들은 35살쯤으로 되돌아가 이 책을 손에 들고 한국어 공부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은 좀 복잡한 소설처럼 읽히지만 라틴어를 익히기 위해 쏟아야 했던 노력의 1/3도 필요 없다”고 극찬했다.

루치우스 로트 신부는 덕원의 다른 수도자들보다 앞서 1949년 5월 9일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루페르트 클링자이스ㆍ아르눌프 슐라이허 신부와 함께 덕원수도원에서 체포돼 함께 평양인민교화소에 갇혔다. 그의 철두철미함과 정확성은 감옥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비밀편지를 작성해 덕원 수도자들이 갇힌 이유와 그 부당함을 세상에 알렸다. 또 그때까지 덕원 수도자 가운데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은 이춘근(라우렌시오) 신부에게 ‘전권 위임’ 편지를 보내 수도원의 명맥을 유지하게 했다.

“나를 비롯한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루페르트 신부, 요셉ㆍ그레고르 수사는 각각 5년 형을, 그레고르 신부와 다고베르트 신부는 7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 모든 것은 이른바 ‘나쁜 사상’ 때문이었다.” 나쁜 사상이란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대치되는 성경과 그리스도교 이념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감옥생활은 혹독했다. 수도자 18명이 8㎡ 감방에서 온종일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어야 했다. 물품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밤에는 자리가 부족해 모두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했다. 돌아누울 때도 구령에 맞춰 18명이 동시에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로트 신부는 좌절하지 않고 수도자들을 격려하고, 작은 목소리로 십자가의 길과 묵주 기도를 함께 바쳤다. 또 서로의 기억을 되살려 성무일도 대부분을 짜 맞춰 기도했다. 그는 비밀편지에서 “우리는 이와 빈대들 사이의 더러움 속에 있으며… 신앙을 위해 고통받고 있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1950년 10월 유엔군이 반격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퇴각하면서 평양인민교화소 수감자 5000여 명을 학살했다. 루치우스 로트 신부도 10월 3~4일 밤에 처형됐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동료 수도자 증언

“그분은 수년 동안 수요일마다 더위와 추위, 폭풍과 비를 무릅쓰고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덕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 반을 달려오셨습니다”(크리소스토마 슈미드 수녀).

“루치우스 원장신부는 맡은 일을 대충 처리하는 법이 결코 없다. 우리 원장신부는 전혀 쉬지 못하고 하는 일들이, 다른 사람이라면 10명이라도 벌써 망가뜨렸을 중노동이기에, 언젠가 그분이 몹쓸 병에라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원장 신부가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온전한 가치를 지닌 인간으로 여기시는 것이 참으로 존경스럽다”(에르네스토 지베르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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