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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전쟁터에서(上)

"내 영명축일에 태평양의 작은 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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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06 발행 [731호]
"내 영명축일에 태평양의 작은 섬으로"


▲ 학병시절 전석재 신부와 함께
 1944년 결국 학병으로 입대해 일본 중부 나가노 부근 마쯔모도라는 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고된 훈련이 연일 계속됐다. 얼마나 잠이 부족하고 배가 고팠던지 그때 소원은 딱 두가지였다. 배가 부르도록 실컷 먹고, 허리가 뻐근할 때까지 드러누워 실컷 자는 것. 요즘은 밤마다 잠이 안 와서 고생을 하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잠이 쏟아지던지….

 훈련소에서도 입바른 소리 잘하는 성격이 불거졌다. 어느날 나이 많은 고참상사가 나와 친구를 부르더니 허심탄회한 대화를 제의했다. 그는 우리가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그 자리에서 고지식하게도 한국인에 대한 차별의 부당성 같은 얘기를 해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까지만 해도 훈련병들 가운데 훈련점수가 2위였는데 그날 이후로 꼴찌에서 2번째로 급락했다. 그 바람에 사관후보생 자격시험을 치를 기회도 박탈당했다.

 훈련을 마치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 커튼을 모두 내렸기 때문에 남으로 가는 건지, 아니면 북으로 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선(戰線)으로 간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뿐이다.

 기차가 멈췄다. 유학생활을 하던 동경과 그리 멀지 않은 요코하마였다. 그곳에서 일주일 가량 대기하는 동안 온갖 흉흉한 얘기가 다 들려왔다. 요코하마 대기 병력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는데 십중팔구는 도중에 미군 잠수함 공격을 받아 물고기 밥이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요코하마 대기소는 사찰이었는데 그곳에서 성탄절을 맞이했다. 전선으로 떠날 날을 기다리면서 성탄밤을 지내는 신학생의 신세가 갑자기 서글퍼졌다.

그때 목사 수업을 받다 입대한 친구가 "거룩한 성탄밤인데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조용한 곳으로 가서 함께 기도하자"고 제의했다. 기쁜 마음으로 따라 나서 조용한 곳을 찾아보았더니 불상 뒤가 제격이었다.

  그 자리에 사람들이 버린 잡동사니가 좀 있었는데 일본 가요집이 눈에 띄었다. 가요집에 성탄캐럴송 '고요한 밤'도 있었다. 우린 이래저래 잘됐다 싶어 기도하고 나서 가요집을 펴들고 '고요한 밤' 노래를 정말 거룩하게 불렀다.

 요즘 일치주간이 돌아오면 천주교, 개신교 등의 그리스도교인들이 한데 모여 일치기도회를 여는데 우린 벌써 그때 일치기도회(?)를 연 셈이다. 그것도 옆에 부처님까지 모셔놓고 말이다.

 이튿날 2000톤급 화물선에 올라 태평양으로 나갔다. 그날이 마침 내 영명축일(스테파노)이라 괜시리 마음이 울적했다. 파견지는 남쪽의 작은 섬 부도라는 곳이었다. 직선 거리로 3일이면 갈 것을 미군 잠수함을 피해 지그재그로 가야 하기 때문에 꼬박 6일이 걸린다고 했다. 배멀미가 하도 심해서 아무 것도 먹고 마시지 못했다. 배에는 연료 드럼통과 탄약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 위에 가마니를 깔고 축 늘어져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항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친구가 헐레벌떡 뛰어 내려오더니 비상 구명대를 챙겨 빨리 갑판으로 올라가라고 소리쳤다. 미군 잠수함이 출몰(出沒)하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갑판 위에서 사색이 되어 검푸른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연료와 폭발물을 산더미처럼 실은 배가 어뢰 공격을 받으면 배는 물론이고 사람도 산산조각이 날 판이었다.

  겁에 질려서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폭풍 전야의 고요가 느껴졌다. 물결이 찰랑찰랑 흔들리는 수면 저 아래에서는 이미 어뢰가 배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태평양 망망대해에서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위기.
 
   그 순간 어머니의 모습이 수평선 위로 또렷하게 떠올랐다. 불현듯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어머니의 무릎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참 이상한 체험이었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만일 내가 죽게 되더라도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는 절대 죽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어미의 심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마지막 순간에 눈에 밟힌다면 자식의 고통 또한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죽음이 닥치자 정반대로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졌다.

 나는 그때 스스로 만들어 낸 생각과 본심(本心)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그 이후로 내 생각이 앞설 때면 나의 본심, 즉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성찰해보게 되었다.

 천만다행으로 잠수함은 우리 배를 공격하지 않았다. 죽음을 모면한 것이 기쁘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큰 하느님 사랑에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또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어머니에 대한 정이 이토록 애틋하게 마음 속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때는 어머니의 사랑이 부담스러워 일부러 거리를 둔 적도 있었는데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내 인생의 큰 소득이다.

 우리가 주둔한 섬에서는 다행히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유황도를 미군이 점령하고 난 후에는 매일 오전 일정한 시각에 미군의 폭격이 있었다. B-29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하고 돌아오다 남은 포탄을 소진하느라 떨어뜨리는 폭격이었기 때문에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침내 나와 동료 학병 몇명은 유황도로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은밀히 계획을 세웠다.

 카누처럼 생긴 조그만 배 한척을 어렵사리 구했다. 그리고 수류탄, 비상식량 건빵, 흰천을 감춰두었다. 흰천은 바다 한가운데서 미군 비행기나 군함을 만나면 항복의 표시로 흔들려고 준비했다. 탈출 직전까지 우리를 망설이게 한 것은 유황도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D-day,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다.

정리=김원철기자 wcki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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