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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이냐시오 로욜라 (11)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이냐시오 로욜라 (11)

여덟 번의 이단 검열과 3주간의 옥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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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4 발행 [1433호]



비록 예루살렘에 머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하더라도 영혼을 돕겠다는 이냐시오의 근본적인 열망은 지속됐다. 이냐시오는 영혼을 돕기 위해서 공부를 더 하기로 했다. 공부를 더 하는 것이 왜 영혼들을 돕는 길인지 자서전의 본문은 정확히 전해 주지 않지만 이렇게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카르도넬 강가에서 이냐시오는 영적 조명을 받았고 아직 완성본은 아니었지만 영신수련으로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신수련으로 사람들을 돕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사람들을 더 돕기 위해서는 영신수련이 공적인 차원으로도 발전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신수련」 책자를 교회에서 인준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인준 과정에서 교회는 성경과 성전을 바탕으로 「영신수련」을 심사할 것이다. 이냐시오가 공부하게 된 이유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이냐시오는 서른세 살에 라틴어 문법 기초를 배우기 위해 ‘어린아이’들과 함께 교실에 앉아 공부했다. 바르셀로나에서 1524년부터 1526년까지 2년간 문법을 배운 후 철학이 주요 과목이었던 알칼라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여기에서 공부뿐만 아니라 사도적 열정도 유지했다. 그래서 곧 네 명의 동료를 모았고 이들과 함께 살았다. 이냐시오는 여전히 영신수련을 지도했고 교리도 가르쳤다.



교회의 중개 거부하는 조명주의

이 시기의 이냐시오의 생애와 관련해 특징적인 부분은 이냐시오가 조명주의자(Alumbrados)로 의심을 받은 것이다. 이 의심은 예수회 설립 초기까지도 계속됐다. 조명주의는 스페인에서 시작된 이단적 영적 현상이다. 조명주의자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성령에 의해 조명받았다고 주장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강조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철저히 수동적이다. 이들은 정신 기도를 중요시했다. 정신 기도가 하느님과 직접적인 접촉을 가능하게 하고 이것이 하느님과 일치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교회의 중개를 거부하고 심지어 교회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모든 종류의 종교적 예식, 성체 공경, 성인들을 통한 전구 등을 거부했다. 이러한 행위는 오히려 하느님께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한다고 주장했다. 베아타(beata)라고 불린 그들의 리더는 바오로 사도보다도 그리스도교 사상에 더욱 조예가 깊은 인물로 간주됐다. 조명주의자들은 교회가 아닌 개인 집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회원이 누구인지는 비밀로 했다. 교회는 이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1525년 알론소 만리케(Alonso Manrique)를 종교재판관으로 임명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소는 이들을 찾아내어 조사하고 처리하는 데에 커다란 힘을 기울였으며, 알칼라대학을 포함해서 톨레도교구 전역에서 매우 광범위한 조사가 이뤄졌다.



이냐시오가 조명주의자가 아닌 이유

왜 이냐시오는 조명주의자로 오해받았을까? 이냐시오가 알칼라로 공부하러 갔던 바로 그다음 해인 1526년은 무엇보다도 매우 민감한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조사관의 눈에 이냐시오는 매우 이상하게 보였다. 이냐시오는 알칼라에 도착한 후 맨발에 모자 달린 평범한 수단을 입고 십계명, 대죄, 성령의 힘 등을, 바오로 사도나 다른 성인들의 저술을 강론했다. 강론을 들은 사람 중 어떤 이들은 일상적이지 않은 영적 신체적 현상을 겪기도 했다. 이때 이냐시오 동료 중의 몇몇은 조명주의자로 고발당한 상태이기도 했다. 이러한 외적인 측면과 더불어 「영신수련」 15번에 나타나 있는 이냐시오의 근본적 신념, 즉 “창조주 하느님이 몸소 그 열심한 영혼과 통교하신다”는 부분은 조명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노선과 같은 선상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이에 더해 관상과 활동을 결합하려는 열망,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각적 경험, 삶의 일상적 결정 안에서 신적 섭리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등은 이냐시오와 조명주의자들에게 공통된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곧 이냐시오가 조명주의자라는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냐시오가 조명주의자였다면 이 사실은 알칼라의 종교재판소에서 발견됐겠지만, 종교재판소는 이냐시오에게 아무런 혐의도 발견할 수 없었다. 둘째, 이냐시오는 조명주의와 아무런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조명주의는 1529년 당시 매우 대중적이었는데, 그 해에 이냐시오는 이미 파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이냐시오의 가르침이 조명주의의 가르침과 비슷할 수는 있으나 이것이 본질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표면적으로 비슷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냐시오와 조명주의자들이 교회를 대하는 태도가 전적으로 달랐다. 이냐시오는 교회의 사람으로서 교회를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했지만, 조명주의자들은 교회의 중개적 역할을 거부했다. 또 조명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이냐시오는 자신의 영적인 사정에 관한 생각을 절대 숨기지 않았다. 종교재판관들은 이냐시오를 여덟 번이나 검열했으나 결국 이냐시오는 조명주의자가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알칼라에서 여러 일을 겪은 이냐시오는 살라망카로 갔다. 살라망카에서는 약 2개월 정도 머물렀는데, 그중에서 약 3주 동안은 감옥에 갇히는 등 힘든 일을 겪었다. 이냐시오가 조명주의와 관계됐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이런 모든 일은 이냐시오에게 영혼을 돕는 데 있어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준된 방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계기가 됐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에 더욱 매진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결국, 이냐시오는 파리로 가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영혼을 돕겠다는 목적을 위해서 공부를 할 것이고, 자신과 목적이 같은 동지들을 모으겠다고 새롭게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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