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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에 갇히지 않은 아흔 살의 광대 “한국 극예술 더 발전해야”

틀에 갇히지 않은 아흔 살의 광대 “한국 극예술 더 발전해야”

[타인의 삶] (10)연극 연출가 김정옥(보나벤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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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9 발행 [1681호]
▲ 자유롭고 해맑은 아흔 살의 광대 김정옥 연출.



서정주, 구상, 김환기, 박항섭, 천경자, 유치진, 이해랑, 차범석, 백성희 등 우리나라 문화예술계 1세대 거장들이 친교의 장이라도 마련된 듯 한자리에 모여 있다. 연결 고리는 ‘사람박물관 얼굴’의 김정옥 관장이다. 이들은 모두 김 관장이 20세기에 만난 예술인이며, 기획전 ‘아름다운 만남 Ⅲ’을 통해 관람객들을 만나고 있다. 김 관장 역시 1세대 거장 반열에 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다만 그는 현실 세계에 있고, 여전히 전시와 공연을 기획하며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는 ‘타인의 삶’. 오늘의 주인공은 아흔 살의 광대, 연극 연출가 김정옥(보나벤투라)씨다.



주님의 자녀가 된 광대

“난 연극을 했으니까 광대거든. ‘광대는 모두가 아니면 아무도 아니다’, 결국 사람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져요. 수많은 사람 사이의 통로는 얼굴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우리 박물관 이름이 ‘사람박물관 얼굴’이에요.”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에 위치한 박물관에서 김정옥 연출을 만났다. 지난 2005년 문을 연 박물관에는 그가 40여 년간 수집한 석인, 목각인형, 유리인형, 가면, 인물화 등 시공간을 뛰어넘는 다양한 ‘얼굴’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자택을 겸한 박물관에 매일 출근하며 9월 이후에만 ‘아름다운 만남 Ⅲ : 20세기 내가 만난 예술인’전을 기획했고, 매주 ‘고전영화상영회’를 운영하며, 인터뷰 전날에도 국악 공연을 진행했다.

“어제 공연은 아주 좋았어요. 무대와 객석이 그야말로 혼연일체가 됐거든. 영화나 공연은 현재 살아 있는 예술인데, 박물관은 어제 사람들의 작품을 보는 거잖아요. 그래서 어제와의 만남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어우러지는 시간을 갖자는 의미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해요. 물론 젊었을 때처럼 정열적으로 일을 추진하지는 못해. 의술이 발달해도 이런 건 어쩔 수 없나 봐.” 가장 크게는 고관절에 문제가 생겨 거동이 불편해졌다. 이동하자면 보행기구가 필요하고, 난청으로 보청기를 사용해도 의사소통이 예전만 못하다. 그도 그럴 것이, 1932년생, 우리 나이로 올해 91세이다.

그래서 더 놀랍다. 거주 공간에서 박물관으로 내려가려면 층을 이동하는 리프트까지 동원해야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그 만남의 장에서 끊임없이 사람들과 소통한다. 지난 1월에는 세례도 받았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우리 집사람은 오래전부터 가톨릭 신자였거든. 나도 어떤 믿음은 있었지만, 어느 것에도 구속당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 인생은 광대의 인생이고, 광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유니까. 그런데 이제 인생을 정리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고, 종교가 다르면 저 세상에 갔을 때 아내와 따로 있게 될까 봐.(웃음) 아들딸이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아내와 정이 깊어지고 무엇이든 함께 하고 싶어요.”

세례를 준 김인중 신부와의 인연도 각별하다. 스테인드글라스의 거장으로 불리는 김인중 신부가 프랑스에서 50년간 수도 생활과 작품 활동을 했다면,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수학한 김정옥 연출은 동양인 최초로 국제극예술협회 세계본부 회장에 선출돼 세 차례나 연임할 정도로 국내외 공연예술계에 족적을 남겼다. 김인중 신부는 김정옥 연출에게 ‘보나벤투라’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신부님도 예술을 통해서 가톨릭에 접근한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마음이 통했지. 다만 공부를 너무 안 하고 세례를 받아서.(웃음) 글쎄, 세례를 받고 일상이나 활동에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어요. 그런데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믿음은 확실히 생긴 것 같아.”


▲ ‘사람박물관 얼굴’ 야외 공간에도 다양한 얼굴을 지닌 석상이 가득하다.



경험과 만남의 중요성


1932년생이니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분단, 6·25전쟁, 민주화운동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다. “소년 시절이지만 중학교 때까지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해방 이후에는 과격하지는 않지만 저항정신을 갖고 살아왔어요. 내 생각에 우리 세대가 원했던 건 ‘민족’과 ‘민주주의’였거든.”

그 격동의 세월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또 한편으로 그 누구보다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일단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영화와 연극을 배웠다. 당시 미래의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정책상 입대하지 않고 계속 대학에 다닐 기회, 해외 유학의 길이 열렸던 것이다. “나는 부족한 사람인데 시운(時運)이 좋았다고 할까. 혜택을 많이 받았죠. 전쟁 시기에는 문학 동인들이 시를 썼는데, 그러면서 불란서 영화에 끌려서 프랑스 유학을 갔어요. 며칠 전 우리 박물관 고전영화상영회에서 마르셀 카르네의 ‘인생유전(Les enfants du paradis)’을 봤는데, 50년대에 빠졌던 영화야. 시적 리얼리즘이 뛰어난 작품이거든. 그렇게 영화 공부하러 간 프랑스에서 연극을 알게 됐지. 그래서 사람이 누군가를, 무언가를 만난다는 게 중요해요.”

귀국 후 굵직한 직함만 살펴봐도 극단 자유 예술감독에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 및 예술대학원 원장,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한국영화학회 회장, 국제극예술협회 세계본부 회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등 웬만해서는 하나도 하기 힘든 일을 모두 섭렵했으니, 지난날에 후회는 없을 것 같다. “집사람도 나더러 그런 말을 하는데, 그래도 후회되는 게 많아요.(웃음) 물론 하고 싶은 일을 다양하게 열심히 했다는 건 잘한 것 같아. 연극, 영화, 시가 모두 어우러지는 일들이었고. 지금까지 연출한 100여 편의 작품도 시적인 부분과 연결되어 있거든. 하고 싶은 일을 했다는 점에서는 후회하지 않는 인생인데, 아쉬운 건 어디를 가나 연극만 열심히 하고 돌아왔다는 거. 좀 더 깊게 들여다보고 사람들도 더 많이 만났어야 했는데, 세상 많은 곳을 다녔지만 제대로 보지는 못한 것 같아요. 특히 젊었을 때는 많이 돌아다녔지만 언제나 너무 가난했거든. 이제 돈 좀 쓰면서 여기저기 다니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듣네.(웃음)”



끝나지 않은 자유와 저항정신

누구보다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았기에 몸에 깃든 90년의 세월이 더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거동이 불편하고, 잘 들리지 않고, 경험하고 사고하는 것에 비해 표현력이 저하된 지금의 모습이 마주 앉은 기자의 마음까지 안타깝게 한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인터뷰 내내 놀랍도록 해맑다. 이 박물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욕심나는 얼굴이다. “그래요(웃음)? 난 얼굴에 비해 귀가 큰 편인데. 결국, 사람들의 95%는 자기도 모르게 틀에 박히기 쉬워요. 그렇게 틀에 박힌 인생으로 마감하는 경우가 많지. 그래서 자유라는 개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틀에서 벗어나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러려면 자유와 저항정신이 있어야 해. 우리 인생에도.”

지금껏 틀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운 광대로, 해맑은 표정을 간직할 수 있었던 그에게는 아직도 꿈이 있다. “얼굴박물관 같은 곳이 다른 나라에는 없어요. 그 의미를 잘 이어가고 싶고, 나는 계속 연극을 했으니까 극예술문학관도 하나 만들고 싶어요.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상당수가 극작가인데, 우리나라는 희곡 분야, 극예술이 약하거든. 오태석 등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과 희곡 분야를 좀 더 발전시키고 싶어요.” 이렇게 그에게는 또 하나의 직함이 더해지지 않을까. 김정옥 연출은 우리나라 예술계에 살아 있는 기록, 매일 소장품이 더해지는 움직이는 박물관인 셈이다.


윤하정 기자 monica@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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