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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곤의 불편한 이야기] 착한 사마리아인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

[안희곤의 불편한 이야기] 착한 사마리아인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

안희곤 하상 바오로(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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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8 발행 [1678호]


신자가 아니더라도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한 번쯤 들어보지 못한 이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의 예로 든 것이 강도당한 이를 구한 사마리아인이다. 타인의 위기 앞에서 인간이 취할 태도를 가르치는 이야기는 성경 말고도 많다. 맹자는 우물에 빠진 아이가 보이면 누구든 달려가 아이를 구할 거라 말하면서, 이러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바로 인(仁)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실천윤리학자로 이름 높은 피터 싱어는 아예 자신의 책 제목을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로 짓고, 세상의 가난을 구제하기 위한 자선의 방법과 그에 연관된 딜레마들을 다루었다.

나의 자선이 혹시 자기만족이라는 이기적 동기를 가진 것은 아닌가. 나 개인의 행위라는 게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닐까. 나아가 나의 자선과 기부가 혹시 이 불평등한 세상을 바꾸기보다는 더 오래 지속시키는 데 봉사하는 건 아닐까. “자본주의가 파탄에 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막대한 액수의 기부를 한다는 박애자본주의자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이 차라리 솔직한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20대 젊은 시절부터 풀지 못한 딜레마가 이것이었다. 이 잘못된 세상을 지속시킬 자선을 해야 하는가, 더 근본적인 개혁에 힘을 쏟아야 하는가. 사회운동가도 정치인도 아닌 사람이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게 우습지만, 말 그대로 측은지심을 가진 선량한 사마리아인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보았을 주제다. 답은 쉽다. 두 가지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필요는 없다. 우물에 빠진 아이는 바로 구해야 하고, 그와 동시에 아이들 노는 곳에서 우물을 치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한 답으로 풀기가 어렵다. 평소 장애인에게 공감과 연민을 느끼던 사람도 장애인들이 지하철 시위에 나서자 ‘시민의 발목을 잡는 불법적 방식’은 안 된다고 그들을 비난한다. 우리의 연민과 자선은 혹시 나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에서만 발휘되는 것 아닐까?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은 연민과 돌봄의 대상이지만, 우리의 책임을 묻고 권리를 주장하는 순간 법적 대상이 된다.

반지하 침수 사망자의 집을 들여다보던 대통령의 마음에 연민이 없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장애인들처럼 들고 일어서는 순간, 그들은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들의 연민은 언제든 짜증으로 변할 수 있고, 자비로운 통치자는 언제든 공안의 책임자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이다.

돌봄과 시혜의 본성이 원래 그러하다. 중세 교회의 주된 기능은 자선 시스템을 통해 빈민과 장애인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연민과 동정의 자애로운 성모는 ‘알마 마테르’(Alma Mater)라는 어머니 교회의 이미지로 이전하여 부자와 교회는 가난한 자를 도움으로써 구원을 얻고 가난한 자는 그로써 생존을 이어간다는 이념이 정착되었다. 그 이념은 자본주의 초기에 교화소나 정신병원 등에 이어져서 거지와 범죄자를 교화시켜 다시 노동하는 자로 만든다는 논리로 바뀌었다. 미셸 푸코의 말대로 ‘감시와 처벌’이 ‘관리와 돌봄’으로 얼굴만 바꾼 것이다.

혹시 우리의 교회는 여전히 중세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본다. 우리는 수많은 돌봄 시설과 자선으로 교회가 맡은 사회적 책무를 다하려 한다. 그러나 복지는 아무리 강화되어도 불평등을 해소함만 같지 않다. 이것은 기후 문제에도 그대로 대입할 수 있다. 우리는 쓰레기가 될 상품을 양산하는 기업과 막대한 화석연료를 쓰는 자본들은 그대로 둔 채, 매일같이 분리 배출할 재활용품을 가려내는 사람들 아닐까.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근본적으로는, 강도를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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