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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곤의 불편한 이야기] 연옥 영혼만 영혼인가

[안희곤의 불편한 이야기] 연옥 영혼만 영혼인가

안희곤 하상 바오로(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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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 발행 [1673호]


며칠 전 아내가 저녁 식사를 앞에 놓고 한 가지 얘기할 게 있다고 했다. 그분께서 차분한 목소리로 할 얘기가 있다고 하면 덜컥 겁부터 나는 건 나뿐인가. ‘내가 또 뭘 잘못한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히 아내가 꺼낸 얘기는 무서운 게 아니고 오히려 반가운 제안이었다. 밥을 먹을 때마다 식후 기도를 늘 잊곤 했는데 이제는 빼먹지 말자는 얘기였다.

성당 소모임에서 함께 식사하는데 신부님이 그랬단다. 식후 기도 마지막에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의 안식’을 비는 부분이 있는데,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이 기도가 끝나야만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하시더란다. 산 사람들의 식사가 끝나기만 기다렸는데 기도를 안 하고 일어나버리면 얼마나 허탈하겠느냐는 우스갯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그렇게라도 기도를 권하는 신부님 뜻이 짚였기에 별로 토를 달지는 않았다. 교회가 이렇듯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를 늘 강조하는 것은, 우리들 ‘거룩하고 보편된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모든 성인의 통공’과 죽은 이들과의 통교에 의해 서로 영적인 도움을 주고받음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연옥은 성경에도 전혀 언급이 없는, 후대에 생긴 교리로 알고 있다. 중세 후기에 자본주의 출현과 경제 발전으로 사회가 빠르게 세속화되면서 교회도 이에 대응할 필요가 생겼고, 돈과 욕망을 좇는 신자들에 대해 죄를 정화할 기회로 연옥이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15, 16세기에 소집된 공의회에서 연옥이 교리로 채택되었고, 이렇게 탄생한 연옥은 자본주의 발전에도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한다.(자크 르 고프, 「연옥의 탄생」)

그러나 나는 죄를 정화하는 기회로서 연옥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신자들의 영적인 연결을 믿고 그것을 통해 유한한 우리들의 삶을 죽음 너머까지 확장하는 교리로서의 연옥이 훨씬 의미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통공(通功)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산 이와 죽은 이의 ‘연대’ 말이다. 그 어떤 인간도 홀로 태어날 수 없거니와, 죽은 이들이 첩첩이 쌓은 기억들 위에서 우리의 문화는 이루어졌고, 나는 다시 나의 이웃과 후대에게 내가 겪은 삶의 기쁨과 고통과 희망을 남길 것이다. 그것은 덧없고 유한한 우리 삶이 영원에 도달하는 방식이다.

우리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그것이 반드시 신앙과 영적인 차원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리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이웃과 친구들이 비슷한 경험, 비슷한 환경에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주로 죽은 이들과의 통공을 빌고 교회의 추상적 일치에만 관심을 가질까. 사제의 강론에서나 성당 모임에서나 우리 사회의 당면 문제에 관해 관심과 연대를 요청하는 이야기를 듣는 일은 매우 드물다.

아마도 불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영혼과 저 세상에 관한 이야기는 안전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만, 현실의 ‘통공’과 ‘연대’는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고 부담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최근 우리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장애인들의 지하철 시위나 대우조선 하청노조의 파업에 대해서도 교회 안에서는 작은 관심밖에 없어 보인다. 이런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신자들의 입장도 일반인처럼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데, 가장 현세적이지만 현세적이지 않은 척 고결한 신자들 앞에서 사제들도 입을 다물고 비겁한 쪽을 택한 듯하다. 사회사목이나 노동사목의 역할이 교회에 주어져 있고 그 역할을 다하려 애쓰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한국 교회의 관심은 주로 영혼의 평화에만 기울어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 이곳의 통공을 모르는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통공을 이룰까. 교회는 좀 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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