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신자 있는 곳이라면 험준한 산골·외인 마을도 마다치 않고 달려가

신자 있는 곳이라면 험준한 산골·외인 마을도 마다치 않고 달려가

[신 김대건·최양업 전] (58)다시 8개월간 조선 5도 돌며

Home > 기획특집 > 신 김대건·최양업 전
2022.08.07 발행 [1673호]
▲ 최양업 신부는 조선 5도 127개 교우촌 신자 6000여 명을 담당해 사목했다. 그는 교우촌마다 꼬박 이틀을 머물면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했고, 목숨을 걸고 성사를 기다리는 신자들이 있는 교우촌을 찾아다녔다. 사진은 최양업 신부가 사목한 충청도 도앙골 교우촌. 가톨릭평화신문 DB



조선 교회의 착한 목자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 거의 혼자 조선 교회를 도맡아 사목해야 했다. 이미 밝혔듯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건강이 거동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 직후 1850년 1월부터 장마가 시작되기 전까지 6개월 동안 전국 5도를 돌며 사목한 후, 장마 기간을 비켜 그해 10월부터 다음 해인 1851년 6월까지 8개월간 또다시 조선 5도를 돌며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교우촌을 방문하는 일은 전혀 녹록지 않았다. 최 신부가 맡은 교우촌 대부분은 험준한 산속 깊은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담당하는 조선 5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 곳곳에 있습니다. 저의 관할 신자들은 깎아지른 듯이 높은 산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흘이나 나흘씩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 봐야 고작 40명이나 50명쯤 되는 신자들을 만날 뿐입니다.”(최양업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 절골 교우촌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최양업 신부는 이러한 곳에 자리한 교우촌 127개소를 담당했고, 그가 돌본 신자는 모두 5936명이나 됐다.

최양업 신부는 방문하는 교우촌마다 꼬박 이틀을 머물렀다. 하루 안에 모든 신자에게 고해성사를 준 다음 미사를 주례하고 성체성사를 베풀었다. 그리고 다음날 이른 아침 서둘러 다음 교우촌을 향해 길을 나섰다. 그는 상복을 입고 양반 행세를 한 서양 선교사들과 달리 낮에 이동해 밤에 교우촌을 방문했다. 외교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다. “저는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해야 하고, 공소 순방이 끝나면 한밤중에 모든 일을 마치고 새벽녘 동이 트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같은 편지에서) 이 와중에도 최양업 신부는 급하게 교우촌을 방문해 성사 거행을 서둘러야 하기에 차분히 신자들을 위해 강론을 준비하고, 교리를 가르칠 시간이 없어 신자들에게 늘 미안해했다.



첩보 작전 방불케 하는 성사 집전

최 신부는 단 한 명의 교우도 놓치지 않는 착한 목자였다. 그는 며칠을 걸어 신자가 단 3명뿐인 마을을 찾아가 그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교우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어느 곳에 단지 두 집이 있었는데, 한 집은 가족 중에 일부만 신자였고, 한 집은 가족 전부가 외교인들이었습니다. 신자는 3명인데 남자가 한 명이고, 여자가 두 명이었습니다. 남자는 얼마든지 집을 떠나 멀리 가서 성사를 받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양반 신분이어서 집 밖에 나가는 것이 불가하므로 이 두 여교우들은 성사를 받은 지가 여러 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에게 가야만 했으나 그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여간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한 가지 계책을 궁리해 냈습니다. 외교인 집의 남편에게 그럴듯하게 어떤 사업을 제안하고서 얼마 동안 외출을 시켰습니다. 그 외교인이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저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어 제가 그 여인들에게 갔습니다. 제가 도착하자 신자들이 손님을 영접하는 데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고 그 외교인 집의 여자들에게 하루 동안만 집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비어 있는 그 외교인 집을 임시 공소로 차리고 밤중에 외교인들이 잠든 동안에 신자들이 모여 성사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할 일을 꾸미는 때에는 악의에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비신자들에게 거짓말로 폐를 끼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즉시 천주교를 비난하거나 모두 그 자리에서 순교로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최 신부는 교우촌 방문 중 이웃 마을에 명문 양반가에 시집간 후 19년 동안 집 안에서만 갇혀 지내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유럽산 자그마한 천 조각을 매만지면서 성사를 받을 날만 고대하면서 살아온 안나라는 여교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장 그 집에 몰래 숨어들어가 그녀에게 성사를 집전해 주기도 했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안나라는 이 여교우가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 4권에 나오는 1801년 순교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누이동생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최양업 신부의 기록과 다른 점이 많아 확신할 수 없다. 다블뤼 주교는 “정약종의 누이는 16세 때 과부가 되었으며 훗날 천주교에 입교한 뒤 1851년께 최양업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정약종의 누이는 영의정 채제공의 며느리로 채제공의 서자 채홍근과 혼인했다.

최양업 신부는 이 여교우에게 어떻게 성사를 집전할 수 있었는지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자세히 밝힌다. “그때 저는 안나가 사는 집에서 50리(20㎞) 떨어진 공소에 있었습니다. 한 신자가 저를 찾아와서 안나가 얼마나 열심하고, 또 얼마나 간절하게 저를 기다리며, 또 철저한 외교인 집안에서 얼마나 처량한 처지에 있는지를 얘기해 주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온갖 미신을 숭상하는 곳에서, 혼자서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신자의 본분을 조금도 궐한 적이 없었답니다. 잠시도 끊임없이 줄곧 성사 받기를 간절히 원하며 자기에게 사제 한 사람을 보내주시기를 하느님께 줄기차게 애원하며 기도하였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해 그냥 참고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이 충실한 여교우에게 가서 성사를 집전해 줄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저는 온전히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하고 안나의 진심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유일한 위로인 성체를 모시고 저에게 안나의 얘기를 들려준 그 신자를 데리고 허둥지둥 서둘러 황급히 안나가 사는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그 마을 전체가 외교인이었고, 그 집안 식구들도 모두 외교인들이었습니다.… 그 집 남자들은 모두 밭에 나가서 집 안에는 어른이 아무도 없고 안나만이 홀로 자기 딸과 어린아이 몇 명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 신자는 그 열심한 여교우가 성찰한 것을 적은 쪽지를 저에게 가져왔습니다. 저는 앉은 자리에서 그것을 읽고 즉시 안나의 집으로 들어가 안나를 바깥 사랑방으로 불러내 재빨리 사죄경을 염해주고 성체를 영해 준 다음 곧바로 도망치다시피 나왔습니다. 그때 저는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최상의 감사를 드리면서 빠져나왔습니다.”(최양업 신부가 1850년 10월 1일 도앙골 교우촌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얼마나 자비로운 사목자의 모습인가!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도로 사정이 좋은 오늘날에도 사제 한 명이 전국 5도에 127개 공소를 맡아 신자 6000여 명을 사목하라면 아마도 버텨낼 성직자가 몇 없을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 초인적으로 사목했다.



목숨을 건 사목 여행

최양업 신부는 홀로 교우촌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다. 늘 복사와 함께 사목 여행을 했다. 병인박해 순교자 조화서(베드로, 1815~1866) 성인이 최 신부의 복사였다. 그가 처음부터 최 신부의 복사였던 것은 아니었다. 레오라는 복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최 신부의 임종을 지켜본 마지막 복사임은 분명하다. 조화서는 최 신부가 1850년대 중후반부터 말을 타고 다녔기 때문에 마부 노릇까지 했다.

최양업 신부와 조화서는 사목 여행을 할 때마다 악인들 때문에 늘 가볍게 무장을 했다. 둘이 두려워한 악인들은 처음에는 신자들 사이에서 형제처럼 착하게 어울리다가 나중에는 약탈하는 이리로 변해 박해를 일삼는 이들이었다. 하루는 교우촌으로 가는 길에 주막에 들린 최양업 신부와 조화서는 큰 봉변을 당했다. 주막 주인과 불량배들이 최 신부를 관가에 고발한 것이다. 다행히 관장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풀어주었으나 포졸들과 주민들이 최 신부 일행이 묵고 있던 주막까지 쫓아와 폭력을 행사했다. “우리는 한밤중의 매서운 추위를 피하고자 유숙했던 주막에서 쫓겨나 매를 흠씬 두들겨 맞았습니다. 옷이 찢겨 반나체 되어 강추위로 몸이 꽁꽁 얼어붙었고, 길은 쌓인 눈 때문에 무릎까지 푹푹 빠졌습니다. 능욕과 고통으로 몸과 마음이 기진맥진했습니다.”(최양업 신부가 1859년 10월 11일 안곡 교우촌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최양업 신부는 이렇게 늘 목숨을 내놓고 성사 받기를 갈망하는 신자들이 있는 교우촌을 찾아다녔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 가톨릭평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보기
첨부파일
발행일자조회
오늘의 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