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안희곤의 불편한 이야기] 처음 해보는 일

[안희곤의 불편한 이야기] 처음 해보는 일

안희곤 하상 바오로(사월의책 대표)

Home > 여론사람들 > 평화칼럼
2022.06.26 발행 [1668호]


오랜만에 신문 정치면을 펴들었다가 실소를 하고 말았다. “대통령은 처음 해보는 거라 잘 모르겠다”고 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 때문이다. 공사 구분 못 하고 움직이는 김건희 여사의 행보를 해명하겠다고 꺼낸 이 발언을 듣고 한숨을 쉬지 않은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대통령 단임제인 나라에서 누구라도 대통령은 처음일 수밖에 없는데, 처음은 물론이요 단 한 번뿐인 자리이므로 더욱 막중한 책임을 느끼는 게 정상일 것이다.

대통령직이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처음’이란 두렵고 조심스럽고 한편으로는 벅찬 시간이다. 첫걸음마를 떼는 아기는 엄마·아빠의 응원 속에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일어서고 기우뚱거리며 세상에 나설 준비를 한다.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첫 등교를 하는 초등 1학년 아이는 그 중압감에 눌려 곧잘 울먹이며 학교에 안 가겠다고 버티기도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통령이 처음인데 어쩌라고?’ 하는 마음이라면 아기와 초등 1학년생에게 뭔가 배울 필요가 있다.

천주교에 입교하여 첫영성체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았기에 첫영성체 하는 어린이들 같지는 않았지만, 사제가 “주님의 몸” 하며 건네는 성체에 그만 목이 메어 겨우 “아멘” 하고 화답했던 기억이 난다. 새내기 신자였을 때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고 모든 것이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주었던 것은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하는 기도문이다. 처음 이 말을 대했을 때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절절한 고백과 나라는 존재가 조금이나마 더 나아질 거라는 겸손한 믿음에 울컥 눈물이 솟았다. 서툴렀으니 느렸고, 느렸으니 모든 말씀과 기도를 천천히 하나하나 곱씹으며 몸과 마음에 새기던 때였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기도문을 줄줄이 외고 주일만 되면 시계추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미사에 다녀오는 일상 속에서 처음의 그때처럼 신앙의 깊은 의미를 거의 되새기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천주교 신자가 처음이라서” 하면서 더 이상 서투름을 변명할 일이 없어 다행이지만, 오히려 ‘처음’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서 두렵다.

바리사이인들만큼 성경에서 여러 번 언급되고 비판을 받는 이들도 없는 것 같다. 바리사이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누구보다 율법에 밝고 교리에 정통하며 이방인에 대한 단죄에 엄격했던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현실에서 얼마나 신앙의 참뜻을 실천하고 거룩한 영혼을 유지했는지는 성경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들 율법의 천재들을 생각하자니 내게는 우리 사회에서 수십 년간 법을 맡아 법을 행사해온 이들이 떠오른다. 영어 ‘justice’는 우리말로 사법(司法)으로도 번역한다. 즉 사법을 도맡은 이들은 자신의 직무로 인해 자신의 행위 자체가 정의라고 착각하기 쉽다. 율법의 모범을 신앙의 모범이라고 믿는 경우다. 지금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있으나 그 논리는 흡사하다. 검사들을 정부 요직에 대거 임명하면 법치가 구현되지 않겠느냐고 믿는 논리 말이다. 이런 자기 확신 안에서는 진정한 ‘처음’이란 있을 수 없고, 처음의 실수는 그저 가볍게 지나가는 해프닝일 뿐이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것, 자신이 굳게 믿어온 것을 버리는 사람만이 ‘처음’을 처음답게 맞이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다시 반복할 수 없는 단 한 번뿐인 시간이다. 더구나 대통령이란 ‘처음’이 변명이 될 수 없는 막중한 자리이고 그의 실패는 온 국민의 실패로 돌아간다. 나 역시 처음의 두려움을 까맣게 잊은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 가톨릭평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보기
첨부파일
발행일자조회
오늘의 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