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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출신 노사제의 간곡한 당부, 평화 위한 노력 포기하지 말아야

평양 출신 노사제의 간곡한 당부, 평화 위한 노력 포기하지 말아야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특집- 전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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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6 발행 [1668호]
▲ 올해 99세, 백수(白壽)를 맞은 윤공희 대주교는 “남과 북이 서로 더 잘 알려고 노력하고,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평화를 위한 노력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간곡하게 당부한다.



25일은 6ㆍ25전쟁 발발 72주년을 맞는 날이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이다. 전쟁은 3년 1개월 남짓했지만, 그 상흔은, 이산의 아픔은 깊고도 길었다. 올해로 99세, 백수(白壽)를 맞는 전 광주대교구장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는 평양교구 진남포(지금의 남포)본당 출신으로, 6ㆍ25전쟁 직전에 월남해 평생 이산의 고통을 안고 살았다. 그 사연을 최근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소장 강주석 신부)에서 펴낸 「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에 풀어냈다. 또한, 15일에는 가톨릭평화방송 TV CPBC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오기 위해선 마음의 소통과 일치를 향한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이에 지난해 8월 말과 지난 15일 두 차례에 걸쳐 광주가톨릭대 주교관에서 이뤄진 윤 대주교와의 북한 교회에 대한 인터뷰를 정리해 특집으로 싣는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사라진 북녘 교회의 사제들

“훗날 북한 교회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첫 장면은 진남포본당에서 시작하고 싶어요. 언덕 위에 성당과 작은 마당이 나오고, 성당 옆 아까시나무 그늘에서 할머니 둘이서 물레질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면 어떨까요? 할머니들은 신부님(당시 주임은 조문국 바오로 신부)이 언제 피랍될지 모르니까 물레질을 하는 척하며 사제관을 지키고 있는 거죠. 수상한 사람이 성당에 다가오면 한 사람은 곧바로 교우들에게 달려가 알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5분 대기조 교우들이 달려옵니다. 교우들은 그렇게 신부님을 지켰고, 신부님들은 순교하기까지 양 떼를 보살폈습니다. 평양교구는 그랬어요. 그러자 보위부원들은 사제관 안에 진을 친 교우들을 강제로 끌어내고 신부님만 트럭에 실어 끌고 갔지요.”

윤공희 대주교는 영화 얘기부터 꺼냈다. 1949년 5월 덕원신학교가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강제로 폐쇄된 뒤 진남포본당에 돌아와 있던 윤 대주교, 당시 윤 차부제(次副祭, 부제품을 받기 1년 전에 받았던 품으로, 가톨릭교회에선 1972년에 폐지됐다)는 조 신부를 도와 진남포본당에서 활동했다.

윤 대주교는 월남 당시 조 신부에 대한 얘기를 이렇게 전했다.

“1949년 12월 25일, 성탄을 보낸 조문국 신부님이 저를 불러 홍용호 주교님께서 피랍 전에 하신 말씀을 전해 주셨어요. ‘언젠가는 평양대목구 사제 전원이 희생될 것입니다. 그때를 대비해 평양대목구 사제 중 누구든 한 사람은 남한으로 내려가 먼 장래 평양대목구 재건을 준비해야 합니다’라고 하신 말씀을요. 그래서 조 신부님도 월남할 준비를 하셨는데, 그러던 중에 ‘이게 내가 살고 싶다는 인간적 유혹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월남 계획을 접고 본당에 남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시다가 1950년 4월, 성당과 사제관을 군에 징발당했고, 성당 양로원과 남포시 용정리(현 남포특별시 와우도구역 용정동)에 있던 본당 교우 나 요셉의 집 등으로 옮겨가며 사목을 계속하셨는데, 결국은 6ㆍ25 전쟁 발발일인 6월 25일 새벽 1시에 체포돼 행방불명되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 덕원신학교 재학 시절의 윤공희(뒤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 빨간 점선) 대주교와 학생들, 그리고 앞줄에는 신학교 교수와 교수신부들이 앉아 있다.




행복했던 신학교 시절

윤 대주교는 1924년 11월 8일생이다. 평남 진남포 용정리 태생으로, 윤상(베드로)ㆍ최상숙(빅토리아)와의 사이에 4남 1녀, 5남매 중 셋째였다. 맏이는 신학교에 갔다가 나와서 의사가 돼 신의주성모병원에서 일했던 건희(모세)씨, 둘째는 곤희씨, 셋째가 윤 대주교, 넷째는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에 입회했던 봉희씨, 막내가 세례명을 이름으로 쓴 요안나씨였다. 원래는 11남매였지만, 여섯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났다. 학병으로 징집됐던 둘째 형과 덕원신학교가 폐쇄될 때 수도원에서 강제로 쫓겨난 동생 넷째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큰 형과 윤 대주교만 월남했고, 막내는 북에 남았다.

윤 대주교는 부친 얘기를 들려줬다.

“부친께서는 젊은 시절 목재리공소에서 세례를 받으셨어요. 평안도로 복음이 전해진 관문 같은 곳인데, 지금은 평양직할시 강남군에 합쳐진 평남 중화군 해압면 목재리에 공소가 있었고, 그곳은 교우촌이었지요. 그런데 그대로 농촌에 계시면 가난을 못 면하겠다는 생각으로 진남포로 나가셨어요. 당시 진남포제련소 화부로 일하셨는데, 부친은 이미 한문 공부도 다 하셨고, 신학문도 배워 특히 산수를 잘하셨다고 해요. 그 덕에 진남포 전교회장으로 채용되셔서 26년 동안 전교회장 겸 본당 회장으로 일하셨지요. 특히 상장계(喪葬契)를 활성화시켰는데, 연령회 같은 것이었다고 해요. 저 또한 어릴 때부터 부친을 따라 매일 미사를 본 뒤 본당 부설 해성학교에서 교리를 배우고, 레오 스위니 신부님 곁에서 미사 복사를 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라틴어를 몰라 우물쭈물했는데, 나중엔 제법 유창하게 했어요. 한 번은 본당 원장 수녀님이 복사를 하던 저를 보고 ‘너 신부 돼야 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뒤로는 ‘어른이 되면 신부를 해야 하나 보다’ 싶어서 그냥 신학교에 간 거예요.”

그래서 해성학교를 졸업한 윤 대주교는 평양교구 예비신학교였던 평양 성모보통학교, 덕원소신학교를 거쳐 1946년 덕원신학교 철학과를, 1949년 신학과를 수료했다.

“평양교구에선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간 아이들 중에서 예비신학생을 모집했어요. 당시 서포에 있던 메리놀 외방전교회 본부 근처 초가집 두 채에서 예비신학생들이 함께 살았어요. 우리 때는 11명인가 예비신학생들이 들어왔는데, 1년 동안 기차로 통학하며 평양 성모보통학교에 다녔어요. 그렇게 6학년을 마치면, 평양교구에선 다 서울로 보내 동성상업학교 소신학교 과정을 밟게 했어요. 그런데 저희 때부터 예비신학생들을 반반씩 나눠 반은 서울로, 반은 덕원으로 보냈어요. 그렇게 소신학교에 가기 전 평양의 큰 병원(평양연합기독병원)에서 엑스레이도 처음 찍어봤어요. 서울로 가는 학생들은 3월 초 개학을 앞두고 조금 먼저 떠났고, 저는 덕원으로 가라고 해서 그리로 갔지요.”



천당에 계실 교장 신부님은 뭐라 하실까

윤 대주교의 신학교 시절은 ‘행복했다’. 북간도(연길교구)에서 온 신학생들까지 총 24명이 들어왔지만, 한 학기 지난 뒤 8명이 신학교를 떠나야 했다. 입학 직후 안셀름 로머 교장신부가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에게 입학생들을 데리고 가니, 주교아빠스가 “너희 중에 6명만 신부가 되면 내가 기뻐서 춤을 추겠다”고 했는데, 그중 5명만 사제가 됐다. 연길교구 출신 김남수(안젤로, 전 수원교구장) 주교와 윤 대주교, 연길교구 이종순(라우렌시오) 신부, 함흥교구 최명화(베드로) 신부, 평양교구 김진하(요한 사도) 신부였다.

“그 5명을 다 기억해요. 그런데 1명도 같이 사제품을 받지 못하고, 제각기 서품을 받았지요. 라틴어를 10시간씩 공부할 정도로 공부에 열심을 보였던 김남수 주교는 건강도 좋지 않고 빨리 신부가 되고 싶은 생각에 1년 월반해서 동기들보다 1년 먼저 사제가 됐어요. 김 주교와 1, 2등을 다투던 제게 교장신부님이 ‘너도 월반하고 싶으면 해라’ 하셨는데, 저는 ‘생각이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월반해서 사제가 됐으면, 아마도 저도 피랍됐을 겁니다. 그래서 요즘도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 하느님께서 왜 날 살려주셨는지’ 생각하곤 합니다. 덕원신학교에서 12살 때부터 24살까지 살았는데, 그 13년 동안 우리를 키우다시피 하셨던 교장신부님께서 훗날 천당에서 저를 보시면, ‘너 잘했다’고 하실지, 아니면 ‘너, 이놈’ 하실지 모르지만, 가끔은 그 교장신부님 생각을 합니다.”



평양교구 재건 기약하며 남으로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해방을 맞고도 신학생들은 두 달여 동안 신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 사이 그해 10월 하순 홍용호 주교의 비서이자 교구 재단 일을 맡고 있던 강창희(야고보) 회장의 피살 사건이 터졌다. 새벽 4시에 걸려온 전화에 조문국 부제와 윤공희, 지학순 신학생이 달려가 보니 강 회장이 왼쪽 가슴과 팔에 총탄 3발을 맞은 채 숨져 있었다. 공산 치하 평양교구의 첫 순교자였다.

박해는, 시련은 끝이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토지개혁령을 선포, 성당과 수도원 전답과 임야 등을 모두 몰수하면서 신학교 또한 어려움에 부닥쳤고, 1947년 화폐 개혁이 단행되면서 교회에 대한 압박은 커져만 갔다. 덕원수도원에서 불법 양조 혐의로 다코베르트 엥크 수사가, 반공 삐라 인쇄 혐의로 루도비코 피셔 신부가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는 사우어 주교아빠스는 물론 모든 신부를 체포해 갔다. 그런 와중에도 1948년 윤 대주교는 장선흥, 이종순, 최명화, 장대익 신학생과 함께 차부제품을 받았다.

“사우어 주교아빠스께서 체포되신 게 1949년 5월 9일 밤인데, 아빠스님과 세 신부님이 연행되실 때 그 현장에 제가 있었어요. 그런 일이 닥칠 거라는 건 짐작하고 계셨겠지요. 아빠스님은 훗날 평양감옥에서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성인이 되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이에 앞서 그해 5월 7일 신학교가 폐쇄되고, 사우어 주교아빠스마저 체포되자 윤 차부제는 동생 봉희씨와 함께 평양으로 돌아와 진남포본당에서 조문국 신부를 돕는 한편 교구 주교관을 오갔다. 당시 부감목이던 김필현 신부는 그해 5월 14일 홍용호 주교마저 잡혀가자 윤 차부제 등 교구 신학생들을 모아 놓고 “제각기 월남해라. 가면 신학교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부제(윤공희, 장선흥 차부제)는 남아서 교회를 돌보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윤 차부제는 진남포본당으로 내려가 조문국 신부와 함께 지냈고, 장선흥 차부제는 빈 기림리 주교관을 지켰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부감목 김필현 신부를 비롯한 평양대목구 사제들이 하나둘 잡혀가자 김 신부에 이어 교구 책임자를 맡게 된 박용옥 신부도 결국은 신부들이 하나도 남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두 부제도 결국 다 붙잡혀가고 말 것이니, 두 분 부제도 월남해서 신부가 돼 장차 평양교구 재건을 대비하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며 월남을 권고했다. 그러고 나서 1949년 12월 7일 관후리본당 사제관에서 박 신부마저 연행되자 1950년 1월 윤 차부제는 지학순 신학생과 함께 3ㆍ8선 이북 마지막 역인 금교역을 거쳐 1950년 1월 16일 가까스로 월남에 성공했다.



한반도 평화와 평양교구 위해 기도


월남에 성공한 윤 차부제는 서울 대신학교인 성신대학에 편입, 공부를 마친 뒤 그해 3월 20일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고, 평양교구 신우회원들이 함께한 가운데 중림동약현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그러고 나서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보좌로 시작해 광주대교구장직을 끝으로 사목 일선에서 물러났다.

사제로 산 지 72년, 그렇지만 요즘도 윤 대주교는 평양으로 가는 꿈을 꾼다.

“당연히 평양교구 사제로 살 줄 알았지요. 평양교구는 제게 늘 마음속에 있는, 잊을 수 없는 고향 교구입니다. 해서 늘 평양교구를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요즘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노 사제의 심경은 착잡하기만 하다.

“참 안타까워요. 많은 사람이 남북통일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북에 대해선 적대감만 가지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기만 해요. 하지만 평화를 위한 노력은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북녘 형제들에 대한 동질감, 우리 형제라는, 우리 가족이라는 그 생각만은 거두지 맙시다.”

백수를 맞는 노 사제는 또 “제가 오래 살았지만, ‘사랑의 빚’은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며 “그래서 하느님께 갚아주시도록 기도할 뿐”이라고 말하며 긴 인터뷰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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