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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믿을 자유 위해 탈북… “고향 땅에서 전교할 그 날 기다려”

하느님 믿을 자유 위해 탈북… “고향 땅에서 전교할 그 날 기다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에 만난 사람 / 북·중·한 3국에서 3분의 1씩 살아온 김영자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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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9 발행 [1667호]
▲ “북에 두고온 동생들, 북녘 형제들, 이제 그 영혼을 위해 기도밖에 할 게 없다”면서도 “우리, 좌절하지 말고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로 연대하자”고 호소하는 김영자 할머니.



갈수록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흐릿해지는 의식은 사라질 듯 말 듯 가물거린다.

고향 회령과 성장기를 보냈던 청진, 북에서의 삶은 28년 남짓했지만, 부모와 형제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은 잊으려야 어찌 잊을까?

하지만 이제는 “보고 싶은 엄마, 아빠, 언니, 동생들, 천국에서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며 바치는” 기도 또한 지쳐간다.

오는 25일, 2022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앞두고 김영자(바르바라, 87, 서울대교구 공항동본당) 할머니를 만났다. 1963년께 탈북,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거쳐 네이멍구자치구에 정착했던 김 할머니는 31년간 후룬베이얼(呼倫貝爾) 대초원의 아룽치(阿榮旗) 신파조선족향(新發新發朝鮮族鄕)에 살다가 1994년 한국에 들어와 29년째 서울 강서구 개화동에 살고 있다. 최근엔 어렵사리 한국 국적까지 취득했다. 북에서 28년, 중국에서 31년, 한국에서 29년, 전 생애를 북ㆍ중ㆍ한 3국에서 각각 3분의 1씩 산 김 할머니를 만나 북녘땅 고향을 그리는 망향가와 공산화 전후 회령ㆍ청진성당 얘기, 중국을 거쳐 한국에서 살아가는 얘기까지 듣기 위해 멀어져 가는 기억을 애써 되살렸다.



김 할머니는 회령성당에서의 순교 얘기부터 꺼냈다.

“1945년 해방되던 해니까, 제가 딱 10살 되던 해였어요. 당시 우리 성당 주임 신부님이 비트마로 파렌코프(Witmarus Farrenkopf, 朴偉明) 신부님이셨는데, 해방되자마자 소련군이 만주에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박 신부님께선 독일 선교사, 수녀님들과 계림 준본당으로 피란을 가셨어요. 그런데 소련군이 회령성당에 불을 질렀어요. 그 소식을 듣고 박 신부님이 성당에 돌아오셨다가 8월 21일 체포돼 22일 밤에 성당 정원에서 총살됐어요. 제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어른들에게 박 신부님이 순교하셨다는 말을 들었지요. 어머니랑 신자분들이 통곡하는 걸 봤습니다.”

김 할머니는 그 기억이 요즘도 생생하다고 전했다. 자신에게 유아세례를 줬던 사제가 공산화 과정에서 북녘땅 첫 순교자가 됐기 때문이다. 그 뒤로 회령본당 공동체는 불에 탄 성당 지하실에서 수녀들과 공소예절을 해야 했다.

외할머니(마리아)로부터 이어져 2대째인 김 할머니는 어머니 차양금(베로니카)씨 덕에 신앙에 입문했다.

“아버지(김준식)는 세례를 받지 않으셨지만, 제 위로 순희(안나) 언니, 저, 여동생 곱분(베르나뎃타)이가 있고, 남동생 부일(테오도로)과 분도(베네딕토) 등 2남 3녀를 두셨는데, 아침저녁으로 조과, 만과는 물론이고 묵주 신공도 빼먹지 않으셨지요. 어찌 보면 강요받은 신앙이었는데, 엄마가 무서워서 열심히 따라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엄마한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제 삶의 등불과도 같았던 신앙을 주셨잖아요?”

그러면서 김 할머니는 “제가 노래를 잘해서 어른들이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성당 지하실에서 ‘뻐꾹 뻐꾹 뻐꾹새는 웁니다’ 하며 노래를 불렀고, 성당 마당에서 테니스도 하고 운동도 하던 기억이 난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 회령본당.



회령성당이 불탄 뒤 2년쯤 지났을 무렵,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자녀들을 데리고 청진으로 갔다. 그리고는 청진성당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당시 청진성당은 성당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추레했다. 원래도 흙벽돌에 바깥에 시멘트를, 안쪽에 석회를 바르고 석면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임시 성당이었는데, 1945년 11월 소련군이 청진성당 건물에서 지내면서 폐허로 만들어 버린 걸 임시로 복구해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교우라고 해봤자 겨우 200명 남짓했던 것으로 할머니는 기억했다.

청진에 와서 중학교에 다니게 된 김 할머니는 성당에 가지 못하게 하는 아이들과 옥신각신했던 실랑이를 기억했다. 성당 가는 골목길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들이 “어느 학교 몇 학년이냐?”고 묻고 이름을 적어 갔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교사가 질문하라고 하자 할머니는 “제가 성당에 가는데 못 가게 막느냐?”고 물었고, 이 말에 머뭇거리던 교사가 “‘신앙의 자유도 있고, 성당에 다니지 못하게 말릴 자유도 있다’고 답변하는 걸 들으며 어처구니없어 한 적도 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이 정도 탄압은 시작에 불과했다. 1945년 마르코 바잉거 신부가 병사하면서 청진본당에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재철 신부는 1950년 6월 24일 체포돼 그해 10월 초순께(9일로 추정) 청진항만 등대에서 80여 명의 종교인이 총살될 때 같이 순교했고 시신은 바다에 내던져져 수습하지도 못했다.

전쟁 당시 부모를 잃은 김 할머니는 청진의과대학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교사가 된 언니 도움으로 살다가 언니마저 결핵으로 타계하자 청진여중을 나와 야간대학에 다니던 중 대학을 중퇴한 뒤 교사가 돼 동생들을 부양했다.

“소학교를 거쳐 평양 제1고급중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힘겹게 살았지만, 늘 추적당한다는 불안에 빠져 살았어요. 신앙 때문이었지요. 한 번은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부르주아같이 왜 그런 노래를 부르냐는 소리도 들었어요. 그러던 중 동생들이 살던 청진에 갔다가 어떤 분한테 중국에 조선족 동생이 있는데 만나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혼기도 꽉 찼던 터라 ‘가겠다’고 말하고 청진에서 남양을 거쳐 도문, 연변을 지나 네이멍구까지 가서 결혼한 뒤 30년 넘게 살았어요. 그때 중매했던 분이 시누이에요. 탈북 도중에 연변성당에 갔는데, 거의 13년 만에 미사를 봉헌하면서 얼마나 감격했는지, 지금도 그때를 잊지 못해요. 조선에서 열차를 타고 나왔는데, 도문에 들어서니 열차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거예요. 마음대로 말하는 걸 들으며 자유를 느꼈어요. 그게 1963년 무렵입니다. 제가 북에서 나온 뒤 훗날 제 가족들에게 공안이 찾아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계속 감시를 받았던 것이지요.”


▲ 청진본당.



결혼을 빙자한 탈북은 김 할머니에게 도전이었다. ‘모든 걸 하느님께 맡기고 떠난’ 여정이었다. 그랬기에 탈북이 성공한 것은 “하느님 은총이었다”고 할머니는 고백한다. 중국에 사는 동안 할머니는 남편 김진호(야고보)씨와의 사이에 영택ㆍ영철(베네딕토), 아란(모니카)씨 등 2남 1녀를 뒀다.

자녀들이 성장한 뒤 한국에 온 할머니는 중국에서 만났던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당시 수원가톨릭대 교수 신부) 도움으로 첫 한국어 미사를 봉헌하는 기쁨을 누린다.

“한국말로 미사를 드리게 된 건 연변에서 미사를 봉헌한 뒤 30년 만이었어요.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요즘도 1시간씩 걸려 매일 미사를 다닙니다.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 자유, 이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 마음껏 누리세요. 하느님을 흠숭하고 찬미하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김 할머니는 요즘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날마다 기도를 보탠다. “기도는 힘이 있다”고 믿는 김 할머니는 북녘 형제들이 하느님을 자유롭게 찬미할 그 날이, 북녘땅에서 자유롭게 전교할 그 날이, 통일의 그 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린다.

헤어지는 문가에서 김 할머니는 취재진에 거듭 당부한다. “우리,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로 연대합시다. 좌절하지 말고.”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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