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마침내 최 토마스 사제품 받아, 조선 교회 두 번째 사제 탄생

마침내 최 토마스 사제품 받아, 조선 교회 두 번째 사제 탄생

[신 김대건·최양업 전] (52)사제 수품

Home > 기획특집 > 신 김대건·최양업 전
2022.06.19 발행 [1667호]
▲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상해 장가루성당에서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사진은 가톨릭평화방송이 제작한 드라마 ‘탁덕 최양업’ 중 최 부제가 사제품을 받는 장면. 가톨릭평화신문 DB



조선 입국 실패, 자책하는 최양업

귀국에 실패하고 영국 함선을 타고 상해로 되돌아온 최양업 부제는 무너져 내렸다. 혼자서라도 남아 자신을 데리러 올 신자 배에만 올라타면 조국의 내륙으로 들어가 선교사들과 그리운 가족,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손에 잡힐듯한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메스트르 신부는 요동이나 홍콩으로 다시 가기보다 조선의 소식을 듣고 조선에서 오는 지시를 따르기에 제일 적합한 장소라고 판단해 상해에 머물기로 했다. 하지만 메스트르 신부가 상해에 머물기로 마음먹은 본뜻은 최양업 부제를 배려해서다. 메스트르 신부는 최양업이 빨리 사제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 혼자였다면 저는 아마 벌써 요동에 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양업 토마스를 고려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상부로부터 오는 허락 없이는 서품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청하는 것이 적절할까요? 모르겠습니다. 페레올 주교가 이 젊은이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신부님도 저와 같이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1847년 11월 16일 상해에서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상심이 깊었던 최양업 부제는 조선 입국에 실패한 것을 자기 탓으로 돌렸다. 자신이 부족하고 하느님께 의지하기보다 인간에게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최 부제는 상해 생활을 ‘귀양살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아직도 우리의 서원과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아마도 저는 천상의 도움을 애원하는 데는 너무나 소홀하였고, 인간적인 희망에 너무 의존하였으며, 또한 무수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제가 우리에게 오는 하느님 자비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듯합니다.”(최양업 신부가 1849년 5월 12일 상해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메스트르 신부는 자책하는 최양업이 더는 의기소침하지 않게 하려고 그가 좋아하는 공부를 더 하게 했다. 최양업 부제는 메스트르 신부의 배려로 상해 서가회 성당 예수회 신학원에서 신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메스트르 신부는 최양업 부제가 하루빨리 사제품을 받을 방법을 백방으로 모색했다. 하지만 조선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허락 없이는 최양업에게 사제품을 줄 수 없었기에 메스트르 신부의 고민은 더욱 깊어 갔다. 그래서 그가 궁리해 낸 것이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인 리브와 신부에게 최양업 부제의 사제품을 청한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최양업 부제가 덕행과 재능으로 봤을 때 조선에 큰 희망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리브와 신부가 1843년 6월 마카오에서 데쥬네트 신부에게 보낸 편지 참조) 페레올 주교도 소팔가자에서 최양업을 지켜보면서 “대단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만일 한 살만 더 많았다면 올해 사제품을 받는 게 옳을 것”이라고 칭찬했다.(페레올 주교 1843년 2월 20일 자 편지 참조) 최양업 부제의 사제 서품이 지체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페레올 주교가 직접 그의 사제 서품식을 주례하길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최 부제가 조선에 귀국해야만 했다.



선교사가 절실한 조선 교회

1846년 병오박해로 김대건 신부 등 조선 신자 9명이 순교한 이후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와 함께 충청도 공주 수리치골 교우촌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양으로 왔다. 사제 부족으로 조선 교회 신자들은 여러 해 동안 성사생활을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운 좋게 성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해도 1년에 단 한 차례 미사에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1847년 당시 조선 선교사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ㆍ베르뇌ㆍ메스트르 신부 등 네 명이 있었다. 그중 메스트르 신부와 베르뇌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지 못한 채 중국에 있었고, 페레올 주교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신부는 1847년 여름 사목 활동을 할 수 없을 만큼 중병을 앓고 있었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신학생으로 선발한 이재의와 최형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더 이상 사제로 양성되지 않았다.

페레올 주교는 조선 교회의 사목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본토인 신학생 양성도 시급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저희 (두 선교사는) 교회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예비 신학생 교육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몇 명에게 초보적인 교육을 시작했지만, 그의 때 이른 죽음에 따라 그 작업도 중지되었습니다. 저는 해마다 도와줄 사람을 기다립니다마는 오는 이가 없습니다. 이 대목구의 긴급한 일을 하려면 (최양업) 토마스 부제 외에 두 명의 선교사가 꼭 필요합니다. 이 동료 조력자들이 마침내 조선에 들어올 수만 있으면, 외국으로 보낼 방법이 없는 예비 신학생들은 국내에서 교육을 받을 것입니다.”(페레올 주교가 1847년 11월 25일 한양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1848년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또다시 해로를 이용해 조선으로 입국할 방법을 모색했다. 이번에는 프랑스 함대를 이용하지 않고 중국 배를 빌려 김대건 신부가 부제 때인 1845년 한양에서 작성한 ‘조선전도’ 사본을 해도로 이용해 백령도로 입국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베시 주교의 후임으로 강남대목구장에 임명된 예수회 출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마레스카(Francois X. Maresca,1806~1855) 주교의 반대로 단념하고 만다. “마레스카 주교는 제가 배를 타고 있는 것이 그의 선교지와 다른 선교지들에 어떤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두려워 저의 계획을 완전히 단념하게 하였습니다.… 더 좋은 기회가 나타나지 않으면 저는 여기에 음력 3월까지 있으며, 페레올 주교가 정한 만남의 장소인 백령도까지 산책이나 하러 갈까 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신부님께 보낸 조선 지도 한 장을 중국인을 시켜 제 비용으로 복사해 줄 수 있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지도는 지리학적으로 정확하지 않지만 섬과 해안들을 인지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1848년 9월 8일 상해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부활 제2주일에 상해 장가루성당에서 강남대목구장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사진은 오늘날 장가루성당 전경.




28세의 나이에

이렇게 또 한해가 지났다. 우여곡절 끝에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부활 제2주일에 상해 장가루(長家樓)성당에서 강남대목구장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일부 학자들은 최 신부의 사제서품 장소를 상해 서가회성당 또는 김가항성당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인 두 번째 사제가 탄생하는 은총의 자리였다. 최양업은 부제품을 받은 후 5년 만에 만 28세 나이로 사제가 됐다.

이 감격스러운 순간을 메스트르 신부는 마치 전보를 치듯 단 두 문장의 짧은 편지를 리브와 신부에게 보냈다. “마침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지난 주일에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가 곧 신부님께 편지를 보낼 것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상해에서 1849년 4월 17일 자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아직 정확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메스트르 신부가 1848년 9월부터 최양업 부제와 함께 페레올 주교가 정한 백령도로 갈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지시가 담긴 편지에 페레올 주교가 최양업의 사제 서품을 허락하는 내용이 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백령도 여행을 떠나기 보름쯤 전 최양업 부제가 사제품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백주일(부활 제2주일)에 지극히 공경하올 마레스카 주교님으로부터 저는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토록 고귀한 품위에 언제나 합당한 자로 처신하게 되길 바랍니다. 저의 미천함과 연약함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크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너그러우신 하느님의 자비로 그 짐은 아주 감미롭고 고무적인 것인 만큼, 지극히 무능하고 가난한 제가 날마다 지극히 존엄하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미사 성제를 드리고, 온 세상의 이루 다 평가할 수 없는 값진 대가를 날마다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권능을 받았음은 큰 위로입니다.”(같은 편지에서)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 가톨릭평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보기
첨부파일
발행일자조회
오늘의 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