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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곤의 불편한 이야기] 양초와 마른 빵과 담요 한 장

[안희곤의 불편한 이야기] 양초와 마른 빵과 담요 한 장

안희곤 하상 바오로(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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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2 발행 [1663호]



지금은 다른 본당으로 옮긴 우리 본당의 전 주임 사제는 유머 감각이 꽤 있는 분이었다. 강론 때마다 사람들을 자주 웃게 하여 미사가 즐거웠다. 한번은 강론에서 봉헌 이야기를 꺼냈는데, 미사 지향을 넣을 때의 예물은 얼마가 적당할까 하는 질문이었다. 신자들이 웅얼거리며 답하지 못하자, 신부님은 “천원에서… (뜸을 들이다가) 천억까지입니다!” 하더니 혼자 으하하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그렇다면 미사 봉헌금은 어느 정도가 좋을까요?” 물었다. 교우들이 “천원에서 천억까지요!” 하자 그는 “하하, 이게 저의 함정이죠!” 하고 혼자 또 웃었다.

주임 신부는 이제 얼굴빛을 고치고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예전에는 봉헌금을 ‘연보돈’이라 했는데 그것이 헌금의 참 의미를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버릴 연(捐), 도울 보(補), 내 재물을 덜어 남을 돕는다는 뜻이다. 헌금은 교회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돕는 돈이라는 얘기였고, 그래서 한 번의 연보돈은 타인의 한 끼 식사비 정도가 좋다고 했다. 어려운 이가 더 잘 먹기를 원하면 1만 원 이상 넉넉하게 내고 말이다. 헌금을 천 원만 해서 ‘천주교’라 한다는 오랜 농담이 무색해지는 강론이었다.

한국 천주교가 각 본당에 권고하는 사회복지비 또는 자선비가 본당 예산의 10% 정도라는 건 잘 알려져 있다. 제정이 일치해 있었던 고대 유다 사회에서 십일조는 세금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세금이란 그것을 거두어 다시 분배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10% 예산은 세금처럼 강제해도 좋을 교회의 의무이리라. 그러나 현실은 4%에서 평균 7%가 대부분이고, 개신교는 그조차 1~2%의 참담한 수준이다. 늘 빠듯한 교회 재정을 걱정하지만, 사실은 그마저 교회 자신과 교우들만을 위해 교회 내에서 맴맴 도는 것 아닐까?

연보돈이 가난한 이의 따뜻한 식사 한 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이다. 내가 존경하는 오스트리아 신학자 이반 일리치는 그리스도교인의 정신을 ‘양초와 마른 빵과 담요 한 장’으로 설명한 바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가정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가정도 집집마다 그 세 가지를 꼭 구비해두었다는 것이다. 허기지고 지친 나그네가 문을 두드리면 주인은 양초를 밝혀 문지방을 넘게 하고, 마른 빵이나마 저녁을 대접하고, 편히 쉬도록 낡은 담요를 내주었다고 한다.

어느 독지가가 소외 청소년에게 지정 기탁을 하다가 그 청소년이 값비싼 패딩을 원하자 지원을 끊어버렸다는 사례가 떠오른다. 이제는 베풂이 시혜가 되었고, 그나마 자격 있는 성실한 수혜자만이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가난한 이가 자신의 가난을 증명하는 모욕을 감당해야만 복지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관료적 기준이 ‘공정’의 평가를 듣는 시대가 된 것이다.

요한 세례자의 죽음을 전해 들은 예수님은 참담한 심정을 달래느라 외딴곳으로 물러났다가 군중의 부름을 듣고서 개인의 슬픔 따위는 접고 그들 앞에 다시 나선다. 날이 어두워져서 거기 모인 군중을 어찌할지 걱정하는 예수님께 제자들은 그들을 돌려보내자고 권한다. 그러나 성자는 아무리 춥고 배고파도 그들과 함께 있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그 저녁에 모두를 배불리 먹게 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다. 나는 오병이어가 무슨 기적 같은 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저마다 자기 쌈지를 털어서 함께 나눈 위대한 사건이라 믿는다. 가난한 이들이 오히려 남을 더 도우며,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베풂이라는 가르침이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대에 이런 환대와 우정이 없는 자선과 복지는 다 거짓처럼 보인다. 이웃에게 조건 없이 주는 도움이야말로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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