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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복음]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생활속의 복음]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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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4 발행 [1659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동료 사도들이 토마스에게 전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그런데 토마스는 증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불신의 대명사’가 됩니다.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보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보게 되는 종교인데 그 부분을 간과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토마스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사실 자체를 불신한 게 아니라, 주님께 대한 신앙이 나와 상관없는 남의 신앙이 되어 메말라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보았으니까 나도 당연히 본 것이 되거나, 다른 사람들이 믿으니까 나도 믿어야 하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신앙이란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투신이기에 ‘남의 신앙’으로 대신할 수도, 만족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상처에 자기 손을 직접 넣어봐야만 믿겠다는, 조금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됩니다.
 

토마스가 동료들에게 어깃장을 놓은 것은 자기는 주님의 부활을 절대 믿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듯, 믿음의 반대말 역시 불신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믿고 싶지 않다면 그냥 관심을 끊고 멀어지면 그만입니다. 굳이 동료들과 불화를 조장하고, 진짜 예수님을 만나면 죄송할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이유가 없지요. 토마스가 강한 어조로 말한 것은 “나는 믿고 싶다”는 강한 의지와 희망의 표현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예수님이 부활하시기를 바랐고,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뵙기를 고대했던 겁니다. 그의 마음을 잘 아셨기에, 예수님은 온전히 그를 위해 다시 나타나기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조건을 내걸고 버티는 기 싸움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자비임을 몸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난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기꺼이 당신 상처를 내보이십니다. 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상처를 만져봄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의심하는 마음을 극복하도록 배려하신 것이지요. 다른 제자들 앞에서 자기가 했던 말을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인용하여 말씀하시니, 토마스는 많이 놀랐을 겁니다. 질투와 불신이 눈을 가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그분은 거기 계셨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언제나 함께 계심을 분명히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토마스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함을, 주님의 사랑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의심이 아니라 믿음임을, 주님께서는 의혹과 불신에도 언제나 자신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심을….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주님께 대한 절절한 사랑 고백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는 토마스의 불신을 질책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기쁨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일시적이기에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주님 부활의 그 기쁨을 가슴에 간직한 채 ‘보지 않고도 믿는’, 즉 참된 믿음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는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신앙의 여정을 걷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은 주님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는 오늘날의 ‘모든 신앙인’에게 하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이어져 온 신앙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그 신앙의 힘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모두가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분명한 ‘행복선언’입니다.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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