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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 교우촌 호환 빈번, 박해 피하다 범굴로…

산 속 교우촌 호환 빈번, 박해 피하다 범굴로…

호랑이와 한국 교회사 이야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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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6 발행 [1646호]
▲ 프랑스 일간지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 1909년 12월 12일 자에 실린 조선에서 일어난 호환 삽화.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최양업 신부의 편지에 나온 호랑이

우리 선조들은 밤낮으로 나타나는 맹수 때문에 목숨 걸고 산과 고개를 넘어야 했다. 한양 도성 근처 무악재에서도 호랑이가 사람을 해치는 바람에 무장한 군사들이 행인을 호송했을 정도다. 그런 시대에 한국인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는 11년간이나 쉬지 않고 산간벽지에 숨어 사는 신자들을 만났다. 한 해에만 5개 도에 걸쳐 120곳이 넘는 교우촌을 순방했다고 한다.

최 신부는 신자들에게 호랑이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짐작게 하는 기록도 남겼다. 충남 도앙골(현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50년 10월 1일 자 편지다.

최 신부는 11살 소녀 바르바라가 신앙생활에 집중하기 위해 친구 둘과 교우촌을 떠나 동굴 속에서 지낸 일화를 전한다. 사흘 만에 오빠 손에 붙들려 집에 돌아온 바르바라에게 어머니가 이렇게 소리 질렀다고 한다.

“너는 마귀한테 놀림을 당하는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 너 같은 어린애가 호랑이도 무섭지 않고, 굶어 죽는 것도 겁이 안 난단 말이냐?”



호랑이가 집에 들어와 신자들을 물고 가다

깊은 산 속에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고 사는 천주교 신자들은 늘 호환의 위협에 시달렸다. 제6대 조선대목구장 리델 주교는 형 루이에게 보낸 1864년 5월 25일 자 편지에서 이런 현실을 생생히 묘사했다. 그가 머물던 충남 진밭(현 공주시 사곡면 신영리)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한 교우촌 이야기다.

“주민들은 호랑이가 대낮에도 나타나는 바람에 올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밤에 그들은 호랑이의 습격이 무서워 모두 함께 모여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그들이 기도를 바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반쯤 열려진 문틈으로 호랑이 한 마리가 소나무 가지 울타리(조선 가옥들은 모두 이 울타리를 치고 있다)를 훌쩍 뛰어넘어 단번에 발로 방문을 열고는 태연하게 방안으로 들어와 11세의 아이를 발로 낚아채어 밖으로 집어 던졌다. 이 끔찍한 광경을 본 교우들이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고함을 치며 달려들자 호랑이는 그만 달아났는데, 그놈이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아이는 놔두고 갔다. 나는 그 사건이 있은 지 넉 달 후에 그 아이를 보았는데 그때까지도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그리고 리델 주교는 이렇게 덧붙였다. “해마다 상당수의 사람이 그렇게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에도 그렇게 사라진 교우가 여러 명이 있다.”


▲ 리델 주교.



총을 쏴서 호랑이를 쫓아낸 리델 주교

리델 주교는 1864년 5월 28일 총을 쏴서 호랑이를 쫓기도 했다. 신자들이 마을 근처에서 커다란 호랑이 흔적을 발견하고 두려워한 까닭이다. 당시 선교사들은 자기방어를 위해 총을 갖고 있었다.

“나는 총에 총알을 두 발 장전시키고 있다가 밤이 이슥해질 무렵 놈을 겁주게 하려고 쏘았다. 그렇게 하여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개는 겁에 질려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는데 그 녀석은 호랑이가 가까이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같은 해, 경기도에서 사목하던 칼레 신부도 충남으로 거처를 옮겼다. 호랑이가 많이 나오는 목천 소학골(현 천안시 북면 납안리)이다. 칼레 신부는 3년 뒤,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1867년 2월 13일 자 편지에 이렇게 회상했다.

“소학골은 독수리 둥지처럼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랑이가 득실거리고, 숲이 우거진 산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찾아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러나 조용히 숨어 살기에는 아주 좋은 피신처입니다.”


▲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호랑이 굴을 빌린 허인백ㆍ김정륜ㆍ이양등

1866년이 되자 호환보다 더한 참극이 신자들을 덮쳤다. 약 1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최대 박해, 병인박해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리델 주교와 칼레 신부는 청나라로 피신했다.

한편, 울산 죽령 교우촌에 살던 복자 허인백(야고보)도 김정륜(루카)ㆍ이양등(베드로)과 몸을 숨겼다. 이들은 가족과 함께 경주 단석산에 있는 천연동굴 ‘범굴’에서 지냈다. ‘호랑이굴’이라는 뜻인데, 이와 관련해 세 사람이 동굴 주인 호랑이를 만났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교회사가 김구정(이냐시오)이 1976년 쓴 「한국순교사화」에 실려 있다.

어느 날 큰 호랑이 두 마리가 굴을 들여다보며 포효를 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무서워 정신을 잃고 엎어졌다. 그러자 허인백이 호랑이에게 애걸하듯 타일렀다.

“너희는 비록 짐승이지만 이 산중의 주인이요, 우리는 비록 사람이나 너희보다 더 무서운 포졸들을 피하여 목숨을 살리려고 온 것인데, 오늘 우리가 여기 와서 아마 너희 거처를 점령한 모양이다. 매우 미안하지만 너희는 우리가 잘못한 것을 용서하고 깊이 생각하여 너희 거처를 다른 데로 정하고 있으면 박해가 그친 후에 여기 너희 굴을 내어주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터이다.”

그러자 호랑이들은 마치 허인백의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숙여 살그머니 일어서서 가버렸다.



▲ 경주 단석산 범굴.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제공



호랑이 신령이여! 복명이를 지켜주소서

참혹한 병인박해는 1873년 막을 내렸다. 청나라에 있던 리델 주교는 4년 뒤인 1877년 9월 23일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1878년 1월 28일 그는 한양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리델 주교는 5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있다가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와 청나라 정부 주선으로 6월 5일 풀려났다. 그리고 만주로 송환됐다. 그가 쓴 회고록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에는 이 모든 과정이 생생히 나온다. 호랑이에 대한 언급도 있다. 리델 주교가 호송인력과 의주대로를 따라 황해도 봉산 근처를 지나갈 때 일이다. 다른 여행자들과 무리를 지어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산을 넘어야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리델 주교는 잘 알았다.

“그 동네 어느 집에 가도 호랑이 때문에 빚어진 불행한 이야기가 그치지 않고 들렸는데, 그곳에 횡행하는 호랑이들 때문에 많은 주민과 여행자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여행자들과 합류한 주교 일행은 마침내 산 정상에 다다랐다. 리델 주교는 눈앞에 보인 광경을 이렇게 적었다. “주막으로 사용되는 작은 집 한 채와 호랑이 신령에게 바치는 작은 탑이 하나 있었다.” 한 남자가 그 탑으로 다가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두 손을 비벼 가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여행자 모두를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씩 빌어주는 것이었다. 리델 주교도 포함이었다.

“복명이(이복명, 리델 주교의 한국명)가 이 산을 무사히 넘도록 해 주시고, 그를 호랑이에게서 보호해 주시어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여행하게 해 주시옵소서. 오! 여행자들의 보호자이시여. 그렇게 해 주시옵소서.”

그 소리를 들은 리델 주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반응했다.


▲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호랑이 함정. 출처=「고요한 아침의 나라」



풍수원에서 들려 오는 호환 소식

천주교 신자들은 조선과 프랑스가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사실상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이는 인간들 간의 평화에 불과했다. 호랑이의 위협은 끝나지 않았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남긴 기록에는 여전히 호환에 시달리는 교우촌이 언급된다. 전남 장성 매남리 공소에선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13살 교우 아이가 물려 죽었다. 1896년에 매남리를 방문한 뮈텔 주교는 라크루 신부에게 호랑이 가죽을 선물 받기도 했다. 이곳에서 사냥한 호랑이었다.

강원도 첫 본당인 풍수원에서 사목하던 정규하 신부도 뮈텔 주교에게 호환 소식을 자주 전해왔다. 정 신부는 부임 이듬해인 1897년 새해 인사편지(2월 7일 자)에도 이렇게 적었다.

“강릉 서내 공소의 한 여신자가 호랑이한테 잡혀간 후 거의 몸통만 발견되었는데 복부부터 하반신이 먹혀 머리와 가슴과 손만 남았습니다. 여인은 체격이 장대했고 본명이 아가타라 했습니다.”

정 신부는 안타까운 소식을 덧붙였다. “저 여인에게는 아직 한 살짜리 젖먹이가 있고 몹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1902년 12월 29일 자 편지에는 호랑이에게 넓적다리를 물어 뜯겨 죽은 신자 이야기가 나온다. 풍수원에 사는 원 베드로라는 사냥꾼이다. 사냥감을 너무 열정적으로 뒤쫓던 그는 호랑이와 가까이 마주치고 말았다. 다른 사냥꾼의 총알에 맞은 호랑이는 그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거대한 호랑이가 쓰러져 땅에 구르면서 미처 피하지 못한 첫 번째 사람(원 베드로)을 발견하고는 넓적다리를 물었는데, 한입에 물어뜯어 넓적다리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그는 다음 날로 죽었습니다.



호랑이에게 아버지를 잃은 김문옥 신부

1900년에 사제품을 받은 김문옥 신부는 호랑이에게 아버지를 잃었다. 부산교구 언양본당 살티공소에서 일어난 일이다. 언양본당에서 1993년 펴낸 「신앙전래이백년사」에선 이렇게 전한다. “김문옥 신부의 부친은 이곳에서 호랑이에게 호식을 당했다고 하며 현재 그 무덤은 살티에 있는데, 일명 ‘범찌꺼기묘’로 전하고 있다.”

살티공소 안내문에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다. “김 신부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대구로 판공성사 가시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혀 머리만 남은 것을 교우들이 거두어 안장한 묘소가 공소에서 300m 거리에 있습니다.”

어느 기록에도 김 신부의 아버지가 정확히 언제 호환을 당했는지 나와 있지 않았다. 다만 대구로 갔다고 하니, 대구본당이 설립된 1886년 이후로 추정할 따름이다. 한편, 그의 시신은 무덤 앞으로 새 길이 나면서 2007년께 후손들이 이장했다고 전한다.



▲ 작자 미상, '산신도', 조선시대,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사냥꾼.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사냥꾼. 출처=「고요한 아침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두려운 맹수 호랑이

1911년 독일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조선을 방문했다. 그는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4개월 동안 조선을 여행하며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글과 사진으로 담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이 바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이다.

베버 총아빠스는 책에서 “한국인에게 호랑이는 힘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고관대작의 관대 흉배와 군기는 호랑이 자수로 찬란히 빛난다. 살아있는 호랑이를 본 적 없는 화가도 붓을 들어 호랑이의 힘과 민첩성을 생동감과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그린다”고 설명했다.

그는 반대로 호랑이가 양처럼 순하게 앉아 있는 ‘산신도’도 흥미로워했다. “무서운 호랑이를 막기 위해서는 산신에게 작은 사당(산신각)을 지어 바치고 그곳에 산신 상을 모셔 둔다. 온화한 웃음을 머금은 산신령의 발치에는 그의 자애로 길들인 호랑이가 엎드려 있다. 사람들은 산신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음식을 바치고 향을 피운다.”

그는 황해도에서 본 호랑이 함정도 눈여겨봤는데, “담뱃대보다 신기하다”고 평가했다. “돌무더기를 구덩이 주위에 쌓고, 참나무 가지로 만든 무거운 덮개 문을 공중에 매달린 들보에 연결하여 들어 올렸다. 구덩이 속에는 돼지 한 마리를 미끼로 넣어 두었다”고 묘사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조선에 숲이 빈약한 이유도 호랑이와 연결지었다. 그는 “온돌 난방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에 해마다 마을 주변의 삼림에 불을 놓아 민둥산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긴 꼬리를 빼고도 3m에 달하는 ‘식인 호랑이’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 엄청난 맹수를 상대로 기죽지 않는 호랑이 사냥꾼의 모습에도 감탄했다. “한국의 사냥꾼들은 사냥이라면 그저 미치는 위인들이라 그런 위험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다. 그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호랑이 사냥꾼들의 활약상도 빼먹지 않았다. “프랑스군을 격퇴함으로써 한강을 거슬러 진격하려는 그들의 전의를 완전히 꺾어 버렸다”고 강조했다.

14년 뒤인 1925년, 베버 총아빠스는 두 번째로 조선을 찾았다. 이때 ‘힘의 상징’ 호랑이는 남한 지역에선 멸종에 이른 상태였다. 맹수를 대규모로 포획하는 일제의 ‘해수 구제 사업’이 치명타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한국 교회사에서도 호랑이는 종적을 감추게 됐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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