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고산 저구리 교회 중심 윤지헌, 대역부도 능지처사형으로 순교

고산 저구리 교회 중심 윤지헌, 대역부도 능지처사형으로 순교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71. 윤지헌과 고산 저구리 교회

Home > 기획특집 >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021.10.17 발행 [1633호]
▲ 초남이성지 바우배기 묘소에서 발견된 복자 윤지헌 프린치스코의 유골. 1801년 9월 17일 전주 남문 밖에서 능지처사형으로 순교한 그의 유골은 경추 2번에 잘린 흔적이 있고, 양 팔꿈치 아래와 두 무릎 아래가 절단되어 사라진 상태로 수습되었다. 전주교구 홍보국 제공



참혹한 시신

윤지헌(尹持憲, 1764∼1801) 프란치스코는 형 윤지충의 그늘에 가려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1801년 9월 17일에 처형된 그의 유골은 2021년 3월 전주 바우배기의 묘소에서 양 팔꿈치 아래와 두 무릎 아래가 절단되어 사라진 상태로 수습되었다. 2번 경추와 팔꿈치, 그리고 무릎에는 칼날에 절단된 자취가 남았다. 10년 전인 1791년 그의 형 윤지충과 사촌 형 권상연은 목만 잘렸는데, 그는 팔 다리까지 잘려서 전신이 여섯 도막이 났다. 그마저도 끊긴 팔과 다리는 수습하지 못한 채로 잘린 목만 몸통에 붙여서 묻었다.

왜 그만 이토록 잔혹한 형벌을 받았을까? 앞의 두 사람이 단순히 신주를 태운 패륜멸상(敗倫滅常)의 죄였던데 반해, 윤지헌은 대역부도의 역모에 동참한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신유박해에서 대역부도로 능지처사에 처해진 죄인은 황사영과 유항검ㆍ유관검 형제, 그리고 윤지헌 4명뿐이었다. 네 사람 모두 서양배를 몰고 와 신앙의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는 ‘대박청래(大舶請來)’ 문제에 연루되었다. 당시 국가가 유독 이 사안에 대해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했는지 잘 보여준다. 천주교 내부에서 윤지헌의 역할과 위상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1791년 11월 12일, 윤지충이 처형되자 윤지헌은 그 직후 고산(高山) 고을의 운동면(雲東面) 저구리 깊은 산골로 숨어들었다. 오늘날 행정구역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 속한 곳이다. 「사학징의」에는 적울촌(積鬱村) 또는 적오리(積梧里)로 표기되었다. 그가 고산 지역으로 간 것은 연고가 분명치 않다. 「사학징의」에 실린 각도별 유배자 명단 중 윤지충에게 사학을 배운 인물로 고산 사람 양언주(梁彦柱)가 있다. 윤지헌의 공초에도 고산에서 활동한 교우 이름의 첫머리에 양언주를 거론했다. 윤지헌의 고산행은 아무래도 양언주와의 인연이 작용한 듯하다.

1791년 12월 윤지헌은 폐서인이 되어 고산으로 옮겨온 뒤, 의업(醫業)으로 집안을 일으킨 아버지 윤경을 이어 매약업(賣藥業)으로 생활의 근거를 마련했고, 약롱(藥籠) 안쪽에 공간을 두어 그곳에 사서(邪書)를 숨겨두고 보급에 힘을 쏟았다.

서학으로 처형된 최초의 순교자인 형 윤지충과 사촌형 권상연이 굳건한 신앙을 지켜 세상을 뜬 뒤, 시신과 피의 징표로 보여준 치유의 기적으로 인해 두 사람은 사후에 주교(主敎)의 위상으로 받들어졌다. 윤지헌의 고산 이주는 이 같은 후광을 안고 고산 저구리 교회를 또 다른 신앙의 중심축으로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1801년 3월 28일, 전라감영에서 행한 윤지헌의 공초 문목(問目) 중에 “궁벽한 산골에 몰래 숨어 지내며 옛 습속을 고치지 않고, 어리석은 백성을 가르쳐 꾀어 그 무리를 퍼뜨렸다”면서, 사서(邪書)와 사구(邪具)의 소재를 캐묻는 대목이 나온다. 또 심문 기록 중에 윤지충이 신앙을 지켜 죽은 뒤, 그의 집안이 사학가(邪學家)의 주인이 되었고, 윤지헌이 베껴 쓴 책자와 문서가 서울과 지방으로 널리 퍼졌다고도 했다. 심문관은 또 유항검 형제가 소장한 사학 관련 물품 태반이 윤지헌의 것이었고, 사구(邪具) 즉 사학에 쓰이는 각종 성물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며 소재를 추궁했다.

이로 보아 윤지헌의 집은 당시 호남 지역의 성물 제작소와 서학서 제조창의 역할을 담당했던 듯하다. 당시 전국적으로 이에 대한 수요가 빗발치고 있었다. 이를 판매해 얻은 수익으로 이들은 교회의 운영과 유지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였다.




이존창의 합류 시점

1795년 봄에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몇 해 동안 머물던 홍산(鴻山)을 떠나 고산 저구리로 합류했다. 이존창의 저구리 이주는 윤지헌과의 긴밀한 협의 아래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제 고산 저구리 교회는 호남 교회의 새로운 중심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다만 이존창의 고산 합류 시점을 따질 때 「사학징의」 속 금정역졸 김유산의 공초가 문제가 된다.

김유산은 공초에서 자신이 1791년 7월에 홍산(鴻山)에 갔다가 유순철을 만나, 그 마을에 살던 이존창에게 사서(邪書)와 십계를 배웠다고 했다. 이후 1791년 12월에 이존창은 고산 적울촌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김유산은 고산으로 이존창을 찾아가 다시 사학을 강론했다고 공술하였다.

김유산의 말에 따르면 이존창은 1791년 12월 윤지헌과 거의 같은 시점에 저구리로 들어온 셈이다. 하지만 김유산의 이 기억은 연도에 상당한 착오가 있다. 우선 1791년에 이존창은 홍산이나 고산에 있지 않았다. 충청관찰사 박종악의 「수기」에 따르면 이존창은 1791년 11월 13일에 여사울에서 충청 감영으로 붙들려와 형벌을 받고 내내 공주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박종악에게 잡혀 온 11월 13일은 윤지충이 처형된 당일이었다. 이존창은 엄한 형벌을 버티다가 11월 20일에는 태도를 바꿔 서학을 요술(妖術)이라 하며 정도(正道)로 돌아오겠다는 다짐장을 냈다. 다시 11월 29일에는 배교의 강도를 높여 제 입으로 예수를 배척하고 모욕하면서 소라 하고 말이라 하기에 이르렀다. 「사학징의」에는 장덕유도 예수를 개돼지라고 욕하며 배교의 맹세로 삼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를 소나 말, 개, 돼지에 견주는 것은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는 나중에 회개해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해당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수기」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1792년 1월 3일 박종악의 보고에는 12월 15일경 그를 다시 체포했다가 20일 이후에 풀어주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 이존창은 달레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적고 있는 대로, 12월 30일에 마을 사람의 전송을 받으며 여사울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주했던 듯하다. 그렇다면 김유산이 공초에서 이존창이 1791년 7월과 12월에 홍산과 고산에서 이존창을 만났다는 언급은 도저히 앞뒤를 맞출 수 없는 요령부득의 진술이다.

한편 「사학징의」 속 유관검의 공초에는 “홍산에 사는 이존창이 장차 신부를 숨겨 감추려고 고산 땅으로 집을 옮겼고, 1795년 4월에 제가 이존창과 함께 계동 최인길의 집으로 신부를 뵈러 가서, 인하여 시골집으로 맞이하여 왔다”고 했다. 이 기록으로 이존창의 고산 이주가 주문모 신부가 한양에 도착한 1795년 1월에서 4월 사이였음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고산 교회가 배출한 인물들

윤지헌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 이존창이 합류하자 고산 저구리 교회는 활기가 넘쳤다. 각지의 열심한 신자들이 속속 모여들면서 공동체의 규모가 나날이 불어났다. 1795년 주문모 신부까지 이곳을 방문해 며칠 간 머물며 세례를 주자 이곳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언급된 몇몇 인물들이 이때를 전후해서 고산으로 속속 합류했다. 먼저 충청도 아산의 중인이었던 김강이 시몬은 많은 재산과 종을 모두 버리고 고향을 떠나 동생 김 타대오와 함께 고산으로 이사해 왔다. 그는 신유박해 당시 유력한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집중적 감시 대상이 되었다. 나중에는 등짐장수로 변장해서 경상도 영양의 머루산과 강원도 울진까지 떠돌다가, 1815년 4월에 체포되어 그해 11월 원주에서 옥사했다.

청양 출신 중인으로 풍헌 노릇을 하며 신자의 본분을 지켜 존경을 받았던 김풍헌 토마스는 1796년에 천주교인으로 지목되어 청양 관아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마른 쑥을 항문에 얹어 태우는 형벌까지 받고도 그는 배교하지 않았다. 빨갛게 달군 보습 위로 맨발로 걸으라 하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버선을 벗었다. 그러자 오히려 그 일을 시켰던 사람이 놀라, 미쳤다며 그를 제지했을 정도였다. 이후 고을에서 추방된 그는 부여와 금산 등지에서 교우들을 열심히 가르치며 극빈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 그가 고산 교회의 풍문을 듣고 이곳에 합류했다.

복자 고성대 베드로와 고성운 요셉 형제는 덕산 고을의 벽암 마을 출신이었다. 이들도 신앙생활을 지키기 위해 고산 땅으로 옮겨왔다. 1801년 윤지헌이 잡혀갈 때 고성대도 함께 저구리에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고성대는 이때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이내 잘못을 뉘우치고 아우 및 다른 교우들과 경북 청송 노래산으로 숨어들었다가, 1815년에 순교했다.

이들은 모두 고산에서 순교하지는 않았지만, 윤지헌의 그늘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 전교를 계속 했고, 끝내 순교의 화관을 받았던 인물들이다. 윤지헌은 신유박해 당시 포도청에 끌려와 바친 공초에서, 함께 활동한 교중(敎中)의 사람으로 고산에 사는 양언주(梁彦柱), 안무산(安茂山), 박군원(朴君源), 김광적(金光迪), 한응천(韓應天), 유순철(劉順喆), 김용이(金龍伊), 김요(金) 형제, 진산(珍山)에 사는 목서중(睦序中), 금산(金山)에 사는 김종우(金宗祐), 박맹손(朴孟孫), 영광(靈光)에 사는 윤종백(尹宗白), 강진에 사는 윤제현(尹濟賢), 진산에 사는 박춘지(朴春之), 정산(定山)에 사는 김방통이(金方通伊), 이름을 모르는 박가(朴哥) 등 여러 사람을 꼽았다. 여기에 윤지헌에게 사학을 배운 이로 은진 사람 이채운(李采雲)이 더 있다. 「수기」에 김광적은 청양 사람이라고 했으니, 그도 나중에 고산으로 합류한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로 보아 고산 저구리 교회는 윤지헌을 중심으로 인근 진산과 금산, 영광과 정산, 은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걸친 교인 조직을 아우르던 상당한 규모였고, 열심한 신자들이 속속 모여들어 단단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갔음을 알 수 있다. 막상 이존창의 고산 체류는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1795년 4월 주문모 신부가 다녀가고, 신부를 고산에 모시는 일이 무위로 돌아가자 이존창은 다시 천안 성거산(聖居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1795년 12월 금정찰방으로 내려가 있던 정약용에 의해 체포되어 이후 긴 감옥 생활을 해야만 했다. 고산 저구리 교회, 그 중심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윤지헌이 있었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 가톨릭평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보기
첨부파일
발행일자조회
오늘의 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