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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곤호에서 하선한 김대건 일행, 남경 거쳐 장가루에서 체류

에리곤호에서 하선한 김대건 일행, 남경 거쳐 장가루에서 체류

[신 김대건·최양업 전] (24)에리곤호를 떠나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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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7 발행 [1633호]
▲ 에리곤호에서 하선한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남경교구장 서리 베시 주교의 도움으로 장가루에서 보름간 머물며 조선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사진은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이 머문 것으로 추정되는 상해 장가루성당. 최양업 신부가 이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버려진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

1842년 9월 11일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오송항 선착장에 서서 부두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에리곤호를 허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에리곤호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둘은 자신의 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버려졌다’는 씁쓸함이 울컥 목구멍 위로 올라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9월 9일 오송으로 돌아와 에리곤호에 승선한 세실 함장은 장교들을 급히 소집했다. 그는 준비되는 대로 마닐라로 갈 것이니 출항을 서두르라고 명령했다. 수병들은 일차적으로 마닐라까지 항해에 필요한 부식을 조달하고 돛을 비롯한 모든 항해 장비를 점검했다. 이 모든 게 하루 만에 신속하게 완료됐다.

출항 준비를 마치자 9월 11일 세실 함장은 메스트르 신부를 선장실로 불렀다. 세실은 메스트르 신부에게 “우리는 마닐라로 돌아갈 것”이라고 통보했다. 메스트르 신부는 “적어도 조선 해안은 지나갑니까?”라고 물었다. 세실은 퉁명스럽게 “바람이 그쪽으로 밀지 않는 한 그곳을 지나지 않을 겁니다. 마닐라로 향할 수 있을 때가 오는 대로 그때를 이용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말에 화가 난 메스트르 신부는 “당신은 나를 속였군요. 즉시 하선시켜 주십시오”라고 했다. 5분 후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짐을 갖고 하선했고, 에리곤호는 바로 출항했다.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세실 함장이 조선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으나 일이 이처럼 빨리 틀어지자 당황했다. 메스트르 신부는 “에리곤호가 거만하게 강을 내려가는 동안 이 불쌍한 선교사는 우리의 관대하고 박애주의적인 항해자들한테서 이제 더 이상 얻을 수 없는 숙식을 구하러 한 외교인의 집으로 유쾌하게 갔습니다”라고 호기롭게 알브랑 신부에게 글을 썼으나 그도 앞으로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할지 계획이 없었다.(메스트르 신부가 1842년 10월 2일 강남 장가루에서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참조)

사실 세실 함장은 남경에서 돌아오자마자 메스트르 신부에게 “함선 안에 환자가 많고, 자신의 여행 예정 기간이 짧다”며 “조선으로 가기 어렵다”고 했다. 세실 함장의 말대로 60여 명의 병사가 콜레라나 말라리아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었다. 이는 에리곤호 승선원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였다. 이는 표면상의 이유에 불과했다. 만약, 세실이 병사들의 집단 발병 문제만으로 마닐라로 귀환했다면 그는 당연히 지휘 문책을 받았을 것이다. 올해 7월 코로나19 집단 발병으로 귀환한 청해부대 문무대왕함의 사례만 봐도 이런 일은 지휘관에게 불명예이다. 세실은 마닐라에 있는 인도차이나 총영사 바로에게 급변하는 중국 정세를 보고하고, 프랑스가 청에 대해 챙길 이권을 상의하기 위해 급히 떠나려 한 것이다. 그때까지 “조선 해안을 지나갈 것”이라는 세실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메스트르 신부는 모든 것이 거짓임을 알고 분노한 것이다.

세실의 뜻이 통했는지 프랑스는 2년 후 군함 6척을 몰고 와 1844년 10월 청과 ‘황포(黃)조약’을 맺었다. 청은 이 조약으로 광주, 복주, 하문, 영파, 상해를 프랑스에 개항했다. 여기서 눈여겨볼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프랑스 전권대사 라그르네의 통역관 칼르리이다.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극동대표부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가르쳤던 바로 그 칼르리 신부이다. 환속한 그가 프랑스 외무부 소속 통역관으로 황포조약 체결식에 참석한 것이다. 김대건과 그의 스승이 유럽 열강의 군사력 앞에 청나라가 허물어지는 역사의 현장에 통역사로 참여한 것이다. 우연치고는 놀라운 인연이다.



최양업 일행은 이미 남강으로

부두에 버려진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에리곤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메스트르 신부는 아무 일도 아닌 양 김대건에게 “외교인들 한가운데 우리를 내려놓는 그런 프랑스 배의 덕을 보면서 조선에 가고 싶지 않다”면서 김대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브뤼니에르 신부와 최양업이 있는 집에 가자고 했다.

브뤼니에르 신부와 최양업은 에리곤호가 조선으로 출항하는 줄 알고 하루 전인 9월 10일 하선해 안내인 범요한을 따라 오송 해안가 있는 외교인 황세흥(黃世興)의 집에 머물렀다.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짐을 꾸려 서둘러 황세흥의 집으로 갔다. 아편전쟁이 끝난 직후여서 비무장을 한 서양인이 홀로 중국인 거리를 활보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했다.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과 일면식이 있었던 황세흥은 다급하게 둘을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되는 일이 없었다. 황세흥의 집에 있을 줄만 알았던 브뤼니에르 신부와 최양업이 좀 전에 영국 군함을 타고 베시 주교가 있는 남경으로 떠난 것이었다. 하루에 2번 멘붕을 경험한 메스트르 신부는 빨리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현타가 왔다. 그래서 그는 황세흥을 통해 베시 주교에게 “지금 우리는 사람의 도움을 모두 잃고 외교인 황세흥 씨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달리 조선으로 향해 갈 길을 모색하며 출발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김대건 신부가 1842년 9월 상해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참조)라고 전갈했다.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황세흥의 집에 5일간 머물다가 9월 16일 브뤼니에르 신부와 최양업이 탔던 영국 군함으로 가서 숙박을 청했다. 황세흥 집보다 군함이 서양인에게는 안전했기 때문이다. 영국군들은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을 환대했다. 둘은 다음 날인 17일 베시 주교가 보낸 중국 배에 옮겨타고 남경으로 갔다.

9월 18일 남경에 도착한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산동대목구장이며 남경교구장 서리인 베시(Lodovico Maria dei Conti Besi, 1805~1871) 주교의 환대를 받았다. “우리는 베시 주교님으로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환대를 받았습니다. 둘은 그곳에 있던 브뤼니에르 신부와 최양업과도 다시 만났다. “드 라 브뤼니에르 신부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제 물건을 전부 싸 들고 나타난 저를 보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가엾은 우리 둘은 곧잘 서로를 위로하였으며, 사람이 떠나갈수록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사람이 우리를 저버릴 때 섭리는 우리를 지탱한다는 것을 곧 깨달았습니다.”(메스트르 신부가 1842년 10월 2일 강남 장가루에서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참조)



장가루에서 보름간 머물러

주교관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9월 19일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친분이 있던 예수회 고틀랑 신부와 중국인 신부의 안내로 배를 타고 강남 장가루(張家樓)로 선교지에 머물렀다. 또 브뤼니에르 신부와 최양업은 에스테브 신부의 안내로 다른 교우촌으로 갔다. 서양인 선교사들이 많이 모이면 교우들이 불안해하고, 외교인들에게 쉽게 발각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가 베시 주교의 배려로 장가루에 보름간 머물렀다. 메스트르 신부는 장가루에서 머물고 있을 때 “저는 페브르 신부가 그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집에서 며칠을 묵었습니다. 베시 주교님은 상해 근처에 임시로 소신학교를 세울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저는 그 집을 방문했는데 주교님은 시내에서 15분 걸리는 그곳을 당신의 거처로 정할 예정이십니다”(1842년 10월 3일 장가루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라고 보고했다.

메스트르 신부의 말대로 베시 주교는 상해 김가항 교우촌에 주교관을 짓고 성당을 세운다. 김대건 신부가 1845년 8월 17일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바로 그 성당이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횡당에 메스트르 신부가 말한 소신학교가 세워진다. 김대건 신부가 첫미사를 봉헌한 곳이다. 그러면 오늘날 상해 포동에 위치한 장가루 성당이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이 머문 그 선교지일 가능성 또한 크다.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부활 제2주일에 장가루 성당에서 강남교구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마레스카(Francois X. Maresca,1806~1855)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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