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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질에 피어나는 불꽃… 폭염에도 끄떡없는 대장장이의 열정

망치질에 피어나는 불꽃… 폭염에도 끄떡없는 대장장이의 열정

[타인의 삶] <4>4대째 가업 잇는 대장장이 차인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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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8 발행 [1624호]
▲ 차인규씨가 달군 쇠를 쇠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힘껏 때리고 있다. 망치로 쇠를 때리면서 불꽃이 사방으로 튀고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가는 일. ‘대(代)’를 잇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일이다. 옛것의 정취를 잘 느낄 수 없는 요즘. 대를 잇는 사람들에게서 옛것의 정취가 한가득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장간과 대장장이가 그렇다. 이들은 사람들의 과거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여전히 명맥을 이어오는 이들도 있다. 전통에 대한 사명감과 열정을 가슴에 품은 채.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는 ‘타인의 삶’. 4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대장장이 차인규(예비신자, 쇠모루 대표)씨를 만났다.



대장장이 차인규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29일. 경기도 양주에 있는 차인규씨의 작업장으로 갔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곳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대장간을 찾았다. 그런데 기억 속 대장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장간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한 남성이 걸어왔다.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차씨였다. 짧은 머리의 작고 다부진 체격. 강한 인상 속에는 부드러움이 공존했다. 차씨는 온화한 미소로 반갑게 취재진을 맞았다.

차씨가 작업장을 보여주겠다며 취재진을 안내했다. 그를 따라 들어간 작업장에는 고래가 춤추고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노래하는 새들 옆에는 꽃들이 피어나 있었고 나무들은 가지와 잎을 자랑했다. 놀랍게도 모두 쇠를 녹이고 두드려 만든 작품들이었다. 꽃과 나무, 가지와 잎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가죽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의자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죽 소파와 다름없었다. 쇠를 두드려 만들었다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가죽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모든 작품에는 차씨의 애정이 녹아있었다.


▲ 가마에 개탄(연료)을 넣고 불을 피우고 있다.



차인규씨와 쇠모루


차씨가 이번에는 작업공간을 보여주겠다며 기자를 안내했다. 작업공간으로 들어서자 크고 작은 집게와 망치 같은 도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주한 쇠모루(대장간에서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쇠모루일 겁니다. 골동품 가게에 갔는데 있길래 가격 흥정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샀어요.” 쇠모루를 바라보던 차씨가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차씨가 가마에 개탄(연료)을 넣고 불을 피웠다. 가마에서는 이내 시뻘건 불꽃이 피어났다. 불꽃이 피어나자 차씨가 쇠를 녹이기 시작했다. “쇠는 완전히 녹으면 안 돼요. 두드릴 수가 없잖아요. 쇠는 잘 익어야 해요. 쇠가 가장 잘 익은 상태는 노랗게 된 상태인데 그때 두드려야 해요.” 쇠를 가마에 넣은 지 얼마쯤 지났을까. 쇠가 달아올라 노란 상태가 됐다. “지금입니다.” 차씨가 달군 쇠를 쇠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힘껏 때렸다. ‘땅, 땅, 땅, 땅.’ 차씨가 망치로 쇠를 때리자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뜨겁더라도 빨리 때려야 해요.” 차씨의 망치질에 시뻘건 쇠는 점점 모양을 갖춰갔다.



대장장이의 길

차씨는 4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1대인 차씨의 증조할아버지는 서울 구파발에서 대장간을 했다. 당시 파발로 인해 구파발에는 역참이 있었고 자연스레 대장간도 발달했다. 차씨의 증조할아버지는 구파발에서 이름난 대장장이였다.

2대인 차씨의 할아버지는 대를 이어 의정부에서 대장간을 운영했다. 3대인 차씨의 아버지도 대장간을 운영했는데 6·25전쟁에 참전해 전쟁에서 총상을 입으면서 일찍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다. 차씨는 이후 작은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작은아버지도 대장간을 운영했는데 일을 도우면서 기술을 배웠다.

차씨가 본격적으로 대장간 일을 한 것은 군 제대 이후였다. 대장간 일을 하기 전 다른 직업도 가졌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다른 일을 할 때는 계속해서 하던 게 꼬이고 엮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이 길로 가게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차씨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장장이의 길을 걷게 됐다.


▲ 가족이 카메라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차인규씨의 아내 김미자(아녜스, 의정부주교좌본당)씨, 차인규씨, 아들 차동은(예비신자)씨.



가보지 않은 길

차씨는 1985년 ‘차씨대장간’이라는 이름으로 대장간을 시작했다. 낫과 호미 등을 만들어 팔았다. 장사도 꽤 잘됐다. 그런데 중국에서 값싼 물건들이 대량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농사도 점차 기계화돼갔다. 차씨는 고민했다. 쇠를 다루는 기술은 좋지만,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인테리어 관련 일을 돕게 됐는데 반응이 좋았다. 30년 전 그 일은 지금의 차씨를 있게 했다. 대장간 이름도 쇠모루로 바꿨다. “제가 일을 쇠모루 앞에서 하잖아요. 철모루보단 쇠모루가 느낌이 좋았어요. 어떻게 들으면 프랑스 말 같기도 하고요.”(웃음)

하지만 처음 가보는 길은 마냥 평탄하지 않았다. 쇠를 다루는 기술은 좋지만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차씨는 미군 부대를 다니며 잡지를 구해 공부했다.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덕분일까. 처음 가보는 길은 익숙한 길이 됐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차씨는 늘 공부한다. “가업을 계승은 하되 현대적으로 풀었잖아요. 미래를 내다보려면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들에게 미래를 보여준 셈인 거죠. 그래서 지금 아들도 대를 이어 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 차인규씨가 만든 대형 십자가가 2014년 8월 11일 서울 광화문 앞으로 옮겨졌다. 124위 순교자 시복 미사에 앞서 십자가 설치를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그리고 십자가

2014년 차씨는 한 가지 제안을 받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사목 방문하는데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교황이 주례할 124위 시복식에 사용될 대형 십자가를 제작해달라는 것이었다. “큰 영광이었죠. 그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십자가 제작은 만만치 않았다. 십자가 크기와 무게 때문이었다. 많은 인력이 동원됐다. 제작에는 한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어떻게든 십자가 제작을 시간 안에 끝내야 하고 광화문에 걸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때는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그것만 생각했어요.”

마침내 십자가 제작이 끝나고 행사 당일이 됐다. 광화문을 배경으로 설치된 제대에는 8m 높이의 좌대 위에 4.6m 높이의 십자가가 우뚝 서 사람들 눈길을 사로잡았다. 제대 밑에 지지대를 이용해 십자가를 안정적으로 고정했지만, 차씨는 행사 내내 십자가만 바라봤다. “바람이 불어서 어떻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교황님도 계시는데 만약 쓰러지기라도 하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종교가 없던 차씨는 행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 탈 없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그는 십자가 제작을 계기로 세례를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차씨는 일을 하면서 항상 마음은 십자가를 향해 있다. 성물 작업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하던 일을 제쳐놓고 성물 작업을 할 정도다. 그런데 아직 세례는 받지 못했다. “교리공부도 했었어요.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나중에 꼭 세례받을 겁니다.” 차씨의 아내는 먼저 세례를 받았다.

끝으로 차씨에게 한 마디 청했다. “살아가는 게 어디 쉬운 게 있나요.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어떻게든 자기만의 길을 찾아야죠. 길을 찾아 나가는 게 인생이죠.”


글=도재진 기자 djj1213@cpbc.co.kr

사진=백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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