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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 출생 김대건은 모방 신부에게 세례 받고 신학생 후보로 발탁

솔뫼 출생 김대건은 모방 신부에게 세례 받고 신학생 후보로 발탁

[신 김대건·최양업 전] (1) 김대건 신부의 출생과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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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1 발행 [1608호]
▲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과 어머니 고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진은 솔뫼 성지내 김대건 신부 생가 복원터.



연재를 시작하며

김대건ㆍ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한국 가톨릭교회는 올 한해 희년을 지내고 있다. 이 희년을 보다 뜻깊게 보내기 위해선 이들이 어떤 분인지를 우선으로 아는 게 중요하다. 성경을 읽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듯이, 2000년 역사를 조망하지 않고 그리스도교를 이해할 수 없듯이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의 행적을 알아야 이 분들의 진면모를 깨닫고 현양할 수 있다.

다행히 교회와 역사학자들의 학문 성과로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됐다. 교회와 관변 사료뿐 아니라 전공ㆍ학위ㆍ학술 논문, 단행본들이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에 관해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정보에는 꼭 필요한 것과 유익한 것뿐 아니라 쓸데없는 것들도 있다. 따라서 정보에 대한 식별과 방향 설정이 필요하다.

가톨릭평화신문은 두 사제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신 김대건ㆍ최양업 신부 전’을 연재한다. 이 연재의 목적은 두 사제를 현양하고,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호교론적 관점이나 낙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하지 않을 것이다. 가능한 정신사적ㆍ세계사적 교류에 대한 보편사적 관점에서 두 사제의 삶을 고찰하려 한다. 또한, 과거지향적 고찰이 아니라 비판적 관점에서 현재 한국 교회와 관련지어 학자들의 의견을 소개하려 한다.

필자는 역사 전공자가 아니다. 일개 신문 기자일 뿐이다. 하지만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의 삶의 흔적을 찾아 중국ㆍ홍콩ㆍ마카오ㆍ파리ㆍ로마를 헤매던 경험과 여러 관련 논문과 단행본들을 탐독해 쌓은 얕은 지식을 총동원해 수많은 정보 가운데 한국 교회의 모범이신 두 사제의 삶의 정수를 소개하고자 한다.

연재 내용 중 한때 교회 안에서 학자 간에 쟁점이 되었거나 좀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주제들도 소개하려 한다. 이는 결코 교회 안에 불화를 조장하려는 게 아님을 밝힌다. 두 분에 관한 학술 성과를 소개하여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의 삶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함이다. 이 연재의 핵심이자 확고한 중심은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의 삶과 영성임을 밝힌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김대건ㆍ최양업 신부가 한국가톨릭교회사에 처음으로 공식 등장한 때는 1836년 모방 신부로부터 신학생 후보로 선발되면서이다. 모방 신부는 1836년 12월 3일 자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가 데리고 있었던 세 소년은 첫째로 지난 2월 6일부터 최(양업)토마스요, 둘째는 최(방제)프란치스코가 3월 14일부터, 셋째는 7월 11일부터 데리고 있던 김(대건)안드레아 입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 솔뫼성지 김대건 성인상.




어린 시절

김대건 신부의 어린 시절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반면, 최양업 신부는 자신과 가족들의 진술 기록이 남아 있어 어린 시절을 그나마 정리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과 어머니 고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살 때인 1827년 정해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과 부모를 따라 고향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로 피신했고, 다시 용인 한덕동으로 이주했다. 김대건 신부 가족은 1830년 할아버지가 선종한 후 골배마실에 정착했다. 그리고 1836년 4월 골배마실 아랫마을인 은이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는 게 통설이다.

한때, 김대건 신부와 아버지 김제준의 문초 기록을 토대로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와 세례받은 곳이 용인 ‘굴암’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일성록」의 김대건 신부 공초에 ‘조선 용인 태생’, 「헌종실록」에 ‘용인 사람’이라고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하성래(아우구스티노, 전 수원교회사연구소 고문) 선생이 2002년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는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당시 풍습으로 보면 김대건 신부가 아무리 용인 땅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용인은 객지이며 원 고향은 솔뫼”라며 ‘출신’과 ‘태생’이 지니는 의미 차이를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모방 신부가 1836년 12월 3일자 편지 내용 중 신학생 후보 서약서에 김대건이 ‘충청도 면천 솔뫼’ 출신이라고 명기했고, 가장 친한 동료 최양업 신부 역시 「순교자들의 행적」에서 김대건 신부를 ‘충청도’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기해ㆍ병오 순교자 목격 증언록」에도 김대건 신부의 출신지가 솔뫼라고 직시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교회 사료를 근거로 김대건 신부가 솔뫼에서 태어났다고 분명히 하고 있다. “김대건(안드레아, 1821~1846)은 1821년 충청도 솔뫼(지금의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이냐시오, 1796~1839)과 고우르술라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김해이고, 아명은 재복, 보명은 지식이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천주교회사」 3권 105쪽)



세례 장소

김대건 신부의 세례 장소에 대해서도 학자 간의 이견이 있다. 「일성록」 1839년 8월 7일 김제준 공초와 「추안급국안」 ‘사학모반죄인 양한ㆍ진길등안’ 1839년 8월 13일 김제준 공초 기록에 따르면 김대건 신부가 은이에서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통설과 달리, 용인 굴암의 자기 집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나온다. 김제준은 서울 청파에 살다가 용인 땅으로 이주했고, 선교사가 없을 때에는 1년에 몇 차례 서울의 정하상 집을 왕래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정하상이 서양 신부가 나와 머물러 있다고 했을 때 모방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이후 모방 신부가 지방 순회에 나서서 남쪽으로 내려올 때 자신의 집을 방문해 아들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뽑았다고 진술했다.

모방 신부는 1836년 4월 5일 주님 부활 대축일 이후 본격적인 지방 사목 방문에 나섰다. 그는 1836년 12월까지 서울과 경기, 충청 지역 16~17개 교우촌을 방문하면서 어른 213명과 아이 150명에게 세례를 주고, 어른 110명과 아이 22명에게 보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630명 이상의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85건의 혼인성사를 집전했다. 그리고 8~9명에게 병자성사를 주었다.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 99회차 최 베드로 증언에 따르면 이 사목 방문 여정 중에 모방 신부가 굴암에 방문해 김제준을 회장으로 임명했고, 김제준은 자기 집을 공소로 만들고 주일이나 축일에 신자들을 모아 공소 예절을 하고 교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러한 진술 기록을 근거로 일각에서는 김대건 신부가 굴암의 자기 집에서 세례를 받았거나, 아니면 굴암에서 은이까지 가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원교구 50년사 -Ⅰ.교구사」 91쪽 ‘1836~ 1846년 선교 사제가 사목 방문한 용인 산골지역 공소’ 표에는 모방 신부가 1836년 4~7월 은이를 방문해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했고, 같은 시기 모방 신부가 굴암 김제준의 집을 방문해 그를 공소 회장으로 임명했다고 나온다. 이 자료가 밝히고 있듯이 중요한 것은 소년 김대건이 1836년 4월~7월 사이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성사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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