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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 마지막 미사 봉헌된 숨겨진 동네 ‘은이성지’

김대건 신부 마지막 미사 봉헌된 숨겨진 동네 ‘은이성지’

성 김대건 신부와 수원교구 은이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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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4 발행 [1607호]
▲ 은이성지는 김대건 신부가 세례성사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된 곳이며,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곳이다.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에 맞는 주님 부활 대축일이다. 175년 전 김대건 신부는 어머니 고우르술라를 비롯한 교우들과 함께 경기도 용인 은이에서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미사였다. 그날을 되돌아보기 위해 은이성지를 찾았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미사

“어머니, 이제 가야겠습니다.”

“벌써! 곧 주님 부활 대축일인데 며칠 더 머물다 부활 첨례를 하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신부님.”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돼 헤어진 지 10년 만에 신부가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집에 며칠 더 머물다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함께 하고 떠나라고 간곡히 붙잡는다.

어머니는 신부인 아들이 언젠가 순교할 것이라 직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10년 만에 만난 아들을 쉬이 보낼 수 없었다. 의젓하게 장성한 아들을 한 번 더 쳐다보며 눈에 새기고, 손 한 번 더 잡고 체온을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이게 마지막이다 싶어 따뜻한 밥 한 그릇 더 먹여 보내고 싶고, 버선 하나, 노자도 한 닢 더 챙겨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눈물로 아들을 잡았다.

어릴 적부터 효심 깊던 아들 김대건 신부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혈육의 정을 모질게 끊으려 했지만 차마 홀로 계신 어머니의 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1836년 기해년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가 순교한 후 넋을 놓고 살고 계시다는 어머니의 소식을 그는 익히 듣고 있었다. 1845년 부제 때 홀로 한양에 들어와 현석문을 비롯한 교우들에게 어머니 소식을 듣고 피눈물을 토했던 그가 아닌가. 그래서 김 신부는 은이 상뜸이 곧 은이 윗마을 골배마실 집에서 어머니와 며칠 더 머문 후 은이에서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한 후 다음 날 페레올 주교가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김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입국시킬 해로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 은이는 ‘숨겨진 동네’이다. 대동여지도는 은이를 ‘어은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은이 교우촌과 김대건 신부

은이(隱里)는 ‘숨겨진 동네’ 또는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은이는 신자들 사이에서 ‘응이’, ‘어니’, ‘어은이’라고도 불렸으며, 「좌포도청등록」에는 ‘언리’(彦里)로 나온다. 또 「대동여지도」에는 ‘어은산’(御隱山), ‘어은리’(御隱里)로 표기돼 있다. 은이(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가 한국 천주교회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1810년부터다. 북경 밀사로 활동하던 이여진(요한)이 이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1824년 이전에 이미 은이에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다. 현석문(가롤로) 성인은 매년 가을 은이로 내려와 몇 달간 머물면서 신자들을 가르치는 등 1830년대 은이 교우촌은 지역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였다.

은이는 또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주요 사목 거점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1836년 은이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 그리고 앵베르 주교는 한이형(라우렌시오)을 은이 회장으로 임명해 관리하게 했고, 그 자신도 1838년 12월부터 1839년 1월 사이 이곳을 사목 방문했다.

은이 교우촌은 또한 김대건 신부의 사목지이다. 1842년 12월 변문에서 신학생 김대건을 만났던 조선 밀사 김프란치스코와 교우 임루치아 등의 증언에 따라면 김대건 신부가 조선에 온 후 서울도 전교하고 용인 지방과 근처에서도 성사를 주었다고 한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ㆍ김대건 신부는 1845년 11월 조선에 입국한 후 신자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는 서울을 중심으로 신자들을 사목하며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의 조선 해상 입국로 개척에 힘을 쏟았고, 다블뤼 신부는 충청도를 중심으로 조선말을 배우면서 사목 활동을 했다. 「수원교구사」에 따르면 “1845년 말 김대건 신부가 은이 상뜸이로 내려와 1846년 부활절 전까지 주변 지역 공소를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했는데, 이때 방문한 공소는 양지 터골, 응다라니, 용인 굴암이다”(1권 93쪽)고 한다.


▲ 은이 상뜸이 골배마실은 김대건 신부가 성장한 곳으로 은이에서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하기 위해 이곳 어머니 집에서 며칠간 머물렀다. 사진은 골배마실 김대건 신부 집 터.



성지 은이

수원교구는 2013년 옛 은이공소 터를 매입해 본격적으로 성지 조성을 했다. 그리고 2016년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해 김가항성당을 복원해 그해 9월 성전 봉헌식을 가졌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첫 번째 사제 성소의 열매가 맺어진 자리가 바로 은이임을 증거하는 성전이다.

2001년 도시 개발로 철거된 김가항성당을 실측 그대로 복원한 이 성당은 건축면적 540㎡, 지상 1층 규모로 250여 명이 함께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복원된 성당 기둥과 들보, 동자기둥 중 일부는 김가항성당 철거 당시 수습한 기둥을 가져와 재활용했다. 성당 옆 ‘김대건 신부 기념관’도 마련돼 있다.

은이성지에는 많은 순례자가 김대건 신부의 영성을 배우고, 신앙을 체험하기 위해 찾고 있다.

김대건 신부는 순교 22일 전인 1846년 8월 26일 옥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편지를 쓰고, 어머니 고우르술라를 맡겼다. “제 어머니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10년이 지나 며칠 동안 아들을 볼 수 있었으나 다시 곧 아들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부디 슬퍼하실 어머니를 위로해 주십시오.”

김대건 신부는 이 편지에 앞서 1846년 6월 8일 옥중에서 스승 신부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며 끝에 벗인 최양업 부제에게 어머니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토마스, 잘 있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나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도록 부탁하네.”

이 글을 남기면서 김대건 신부는 은이 교우촌에서 어머니와 함께 드렸던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은이 상뜸이 골배마실 집에서 안아주시던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아들의 효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어머니 고우르술라는 김대건 신부 순교 소식을 듣고는 교우들에게 “아들 신부가 군문효수하여 치명했다”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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