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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소외된 이들 비추는 빛이 되다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소외된 이들 비추는 빛이 되다

지학순 주교의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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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1 발행 [1583호]




심성이 여리고 정의감이 넘치던 소년
 

지학순은 1921년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읍 청학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4년 중화성당에서 ‘다니엘’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심성이 착했던 소년은 동무들이 사과를 서리해서 손에 쥐여주면 본당 신부에게 달려가 고해성사를 보고 한바탕 꾸지람을 들어야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지학순은 사제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의 반대가 심했다. 집안이 늦게 입교한 이유도 있지만, 부모는 아들이 혼자 살아야 하는 신부가 되는 것이 기껍지 않았다. 어렵사리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던 소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허약했던 그는 폐결핵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병세가 호전되자 잠시 직장생활도 했다. 중화군청의 서기로 취직 후 두만강 국경지대 세관에서 근무하며 세상 물정에도 밝아졌다. 하지만 선한 품성이 사그라지진 않았다. 한번은 아기를 업고 밀수하는 부인을 잡았는데 사정을 듣고 보니 박복한 여인이었다.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부인에게 압수품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신학교에서 돌아와 취직까지 했기에 혼담도 오갔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본당 신부로부터 사제가 모자라 걱정이라는 소리를 듣게 됐다. 지학순은 부모에게 사제의 길을 다시 가겠다는 뜻을 밝히고 원산에서 가까운 덕원신학교로 진학했다.
 

성실한 지학순에게도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그의 정의감은 늘 참을성을 이기곤 했다. 때때로 윗반 학생들과 다투기도 했고, 신학교를 중도에 그만둘 수 있는 상황이 닥쳐왔다. 이때 교수 신부들에게 큰 신임을 얻고 있던, 훗날 수원교구장이 된 김남수 신학생이 교장 신부를 말리고 나서 문제가 일단락됐다.
 

해방 후 북녘땅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며 신부들은 연행되고 신학교는 폐쇄됐다. 지학순은 평양교구 김필현 부주교에게 북한 교회의 실상을 서울에 알리라는 중책을 맡게 됐다. 지학순은 고향에 잠시 들러 어머니를 만나 눈물을 흘렸고, 어머니는 “부디 몸조심하고 꼭 살아서 신부가 되어라”라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38선을 넘다 체포돼 모진 고초를 당했고, 고향에서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기적적으로 고향 땅을 다시 밟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체포 소식에 몸져누운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난 후였다. 지학순은 어머니 무덤 앞에서 결심했다. “남쪽으로 내려가 신부가 돼 어머니의 소원을 이루어 내리라.” 지학순은 윤공희 부제와 월남, 혜화동 신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음이 뜨거운 신학생
 

혜화동 신학교에서의 평화로운 시간도 잠시, 한국전쟁이 터졌다. 함경남도 덕원에서 출발해서 평양을 거쳐 서울에 오고, 부산 피난 중 입대해 다시 평남 맹산까지 진군했다가 부산 제3 육군병원에서 제대하는 지학순의 파란만장한 신학생 시절이 이렇게 써내려져가고 있었다.
 

그는 전쟁 중 드러난 인간의 어두운 면과 동료들의 죽음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 한번은 동료 전사자의 집에 가 사망 통지를 하고 돌아오던 길에 솟구쳐 나오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고 한없이 울었다. 그는 돈이 될만한 물건을 챙겨 다음날 다시 그 집을 찾아 가족에게 건넨 후에야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부대가 강원도 원주로 이동했을 때는 안토니오 소콜 신부와 신자들 사이에 통역을 한 일이 있었다. 공소에서 고해성사를 통역하고 부대에서 약을 구해 아픈 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소콜 신부는 지학순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이것이 사제들이 사는 보람이지. 굶주린 영혼들에 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려 주고, 또 아파서 괴로워하는 이를 낫게 해 주고 이보다 더 훌륭한 일이 어디 있겠나. 제대하면 훌륭한 신부 돼서 좋은 일 많이 하게.” 지학순은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아무 대답도 못 했다.
 

1952년 12월 15일 지학순은 백민관 신부와 부산 대청동성당에서 노기남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청주 북문로본당 보좌를 거친 후 1956년 윤공희ㆍ이영섭 신부 등과 로마로 유학을 떠나 교회법을 공부했다. 1960년 서울 가톨릭신학대학 신학부 교회법 교수로 신학생을 양성하다 1962년 4월, 부산 초장동본당으로 발령 받는다.

 

세상의 빛이 된 주교
 

1962~1965년 열렸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가 현대 세계에 적응하여 이에 걸맞게 쇄신되어야 한다는 결말을 내놓았다. 그리고 교회는 현대 세계의 인간이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 기쁨과 희망에 주목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가톨릭교회가 큰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던 1965년 원주교구가 탄생하고 지학순 신부가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지학순 주교는 문장 표어를 ‘빛이 되라(Fiat Lux)’로 정했다. 그는 공의회 정신을 바탕으로 교구의 변화를 꾀했고 평신도들이 본당에서 주인 의식을 갖게 하도록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과 교황 회칙을 공부하게 하였다.
 

교구 내 광부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신용협동조합운동을 벌이고 교육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1960~1970년대 가난했던 지역민들을 위해 전개한 농산물 도농 직거래 개발, 교육 및 사회복지 기관 설립, 정의ㆍ인권 운동을 펼친 모든 일이 세상을 향한 교회 사명을 강조한 공의회 정신과 일맥상통했다. 세상 어느 곳도 교회가 아닌 곳도 없었고 길에서 만난 누구와도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지학순 주교. 지 주교에 관한 일화들은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한 노신사가 원주 시내 쌍다리 아래서 살던 넝마주이 소년들을 찾은 적이 있었다. 아편 중독자나 걸인들도 있었기에 원주 사람들도 피해 다니는 음습한 곳이었다. 노신사는 “제일 급한 것이 살 집”이라는 소년들의 말에 도움을 좀 주겠노라는 대답을 남기고 돌아섰다. 노신사는 이름을 묻는 사람들에게 “지 주교”라는 말을 남겼다. 성은 지요 이름은 주교, 넝마주이 소년이 볼 때는 참 희한한 이름이었다. 지 주교는 약속대로 넝마주이 소년들에게 아담한 시멘트 벽돌집을 지어 주었다.
 

원주교구 출신 첫 사제로 지 주교를 보필해 교구 총대리를 역임했던 이학근 신부는 한 심포지엄에서 “지 주교님은 성격이 다소 급하고 거칠기도 하셨지만, 광산 사고로 죽거나 다친 광부들을 일일이 방문해 함께 눈물을 흘리셨던 사랑 많은 참 목자셨다”고 회고했다. 매년 자신의 통장을 탈탈 털어 각지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부하는 목자였다.
 

지학순 주교는 가난한 자를 등지는 불의한 권력을 미워했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1974년 민청련 사건으로 민주인사들이 수난을 당할 때 지학순 주교도 고통을 함께했다. 1974년 양심선언으로 독재정권은 지 주교를 감옥에 가두었지만, 정의는 들불처럼 이 땅에 퍼졌다.
 

1985년 9월에는 지학순 주교가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찾아 평양의 고려호텔에서 한국 순교 성인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지 주교는 35년 만에 동생을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지만, 분단의 세월이 긴 만큼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판이했다. 누이동생이 쏟아내는 말에 지 주교는 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살아서 천당 가는데 오빠는 죽어서 천당을 가겠다니 돌았구만요. 이곳이 천당인데 천당을 어디에서 찾겠다는 거야요?”
 

1993년 3월 12일, 지학순 주교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 지 주교는 원주에서 장일순 선생과 함께 육영사업, 신용협동조합 운동, 수재민 구호활동, 노동자 교육, 부정부패 척결 운동, 인권보호 운동,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에 앞장선 지역 민중의 아버지였다. 지학순 주교 선종 후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단법인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을 설립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활동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들을 격려하고자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제정, 매년 시상식을 열고 있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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