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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의 승리와 장악, 십자군 전쟁의 불씨가 될 줄이야

셀주크의 승리와 장악, 십자군 전쟁의 불씨가 될 줄이야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7) 디오라마의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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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3 발행 [1580호]
▲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1071, Bataille de Manzikert), 이스탄불 군사박물관, 터키.



아랍 무슬림의 성장, 성지 팔레스타인의 상실

5~9세기 서방에서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가 회복되고 유럽의 주요 왕국들이 점차 윤곽을 드러내며 그리스도교를 구심점으로 신성로마제국이 형성되고 있을 때, 비잔틴 동로마 제국의 동쪽 변방에서는 서서히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7세기 아랍 무슬림이 성장하면서 비잔틴 제국은 그들과의 지속적인 전쟁에서 이집트, 시리아는 물론 팔레스타인까지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팔레스타인의 상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알다시피 팔레스타인은 ‘성지’(Terra Santa)다.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복음을 전하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땅이기 때문이다. 이후 잠시 마케도니아 왕조가 부흥하면서 비잔틴 제국의 영토는 다시 회복되는 듯했으나, 10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8세와 9세를 거치면서 제국은 안으로는 내란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해 허약해졌다.

그 시기, 비잔틴 동쪽에는 셀주크 튀르크(Seljuk Turks)족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원래 튀르크족은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돌궐(突厥)로 중앙아시아의 스텝을 누비던 유목 민족 중 하나였다. 그들은 당나라에서 중앙아시아로 밀려와 살며, 거기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1045년에 이란으로 내려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셀주크라는 왕국을 건설하고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차례로 장악했다. 그리고 그들은 소아시아의 곡창지대 아나톨리아 반도를 넘보았고, 이 때문에 동로마 비잔틴 제국과 충돌했다.



셀주크와 비잔틴 제국 간의 싸움


소개하는 작품은 터키의 이스탄불 군사박물관(Asker Mze)에 있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다. 이 작품은 특정 장면이나 풍경을 일정 공간 안에 입체적으로 전시한 디오라마(Diorama) 작품이다. 무대 장치적인 원근법과 조명 연출에 의한 3차원의 전시 방법으로, 주로 역사적 사건이나 자연 풍경, 도시 경관 등을 제작하여 교육용, 오락용으로 활용된다.

작품이 소장된 이스탄불 군사박물관은 거의 1000년에 이르는 터키군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1950년 오스만 제국의 전 육군사관학교 건물에 개관했다. 박물관은 22개의 전시실에 9000점이 넘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각종 대포와 군인, 갑옷, 투구, 검류, 총기류, 오트만 메테르 밴드(군악대) 등이 있는 사이에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서 정복 전쟁을 벌이던 그들의 조상들을 그린 작품이 있다. 소개하는 작품도 그중 하나다. 13세기 말 이후 소아시아(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슬람 국가 오스만 제국(1299∼1922)의 토대가 되었던 셀주크 튀르크의 중요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만지케르트 전투’는 1071년 8월 26일, 터키 동부 만지케르트(Manzikert)라는 곳에서 셀주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과 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Romanus IV Diogenis 1068~1071)가 부딪힌 싸움이다. 이 전쟁은 결국 셀주크의 승리로 끝났고, 과거 로마 제국의 정통 후예라는 비잔틴의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그 결과 술탄은 아나톨리아가 포함된 소아시아 전체를 장악한 패주가 되었고, 비잔틴과 터키의 운명이 여기서 갈렸다.

이를 계기로 셀주크는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비잔틴을 괴롭히면서 예루살렘 성지로 가는 길목을 차단했다. 급기야 1096년 비잔틴의 황제는 서방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고, 이것이 그 유명한 십자군 전쟁의 발단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1096∼1270년까지, 200여 년간 10차례에 걸쳐 벌어진 것으로, 서방 교회 입장에서는 7세기에 이미 경험한 바, 당시로써는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목적으로 한 명분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기도 했다.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서 십자군 전쟁의 서막과 관련한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20세기 교황님들의 가르침이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라, 이런 아픈 역사를 겪으면서 나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비잔틴 제국의 치욕스러운 패배

당시 상황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만지케르트 전투’의 주인공은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다. 그는 1063년 30대 초반의 나이에 술탄이 되어 중동 전역을 누비며 전투를 했고, 동로마 영내인 카파도키아 일대를 여러 차례 공격하기도 했다. 그는 비잔틴 제국의 동부 전선인 아나톨리아 지방까지 공격했고, 그 과정에서 아르메니아를 손에 넣었다. 나이는 많지 않아도 전장에서만큼은 백전노장인 셈이다.

한편 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는 그런 술탄을 야만족의 족장이라며 하찮게 보았고, 그의 군대를 떠돌이 유목 집단에 불과한 오합지졸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들의 습격을 받고 약탈을 당한 아르메니아 지방을 평정하고자 별렀다. 1071년 봄, 드디어 황제는 군대를 모아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남쪽 지류를 따라 아르메니아로 향했다. 튀르크 사람들로 구성된 비잔틴의 용병부대는 만지케르트 입구에서 둘로 나뉘어 일부는 반(Van) 호수 옆 아클라트 요새로 향했고, 나머지는 황제와 함께 만지케르트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2만 명이 넘는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상비군인 타그마타(Tagmata)는 싸우기도 전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버렸고, 힐라트(khilat)로 가는 길을 탐색하러 간 500명 넘는 노르만 용병도 도망가 버렸다. 또 1000명이 넘는 튀르크인 용병들은 셀주크인 친척들과 접촉한 후 달아나 버렸다. 첫 전투가 시작된 1071년 8월 25일 이전에 이미 로마누스의 군대는 절반 이상이 사라진 셈이었다. 비잔틴 군대의 이런 상황을 간파한 술탄은 마지막으로 평화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황제는 제국을 침략하는 것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보여주겠다며 이를 거절했다.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술탄은 비잔틴군과 거리를 두고 유목민 특유의 동물적 감각으로 적의 동태를 살폈다. 셀주크군은 4km 떨어진 곳에서 초승달 모양의 진형을 이루고 비잔틴군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목표물이 그들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초승달 모양의 진형 중앙은 양쪽 끝에서 적을 포위하여 압박하는 동안 뒤를 터 주었다. 중앙을 지나가는 사이에 비잔틴군은 셀주크 궁수들에 의해 치명적인 피해를 당하였다. 이에 기병대를 동원하여 셀주크를 압박하자, 그들은 초원의 전사답게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했다.

밤이 되자 결국 로마누스는 군대에 퇴각을 명령했고, 배후에서 잔여 병력을 담당하고 있던 장군 안드로니쿠스 두카스는 패전의 기미를 느껴 황제군의 퇴각을 돕는 대신 만지케르트 전장을 벗어나 부하들과 함께 달아났다. 비잔틴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황제의 좌우에 있던 군대도 조금 버티다가 곧 퇴각하고, 결국 황제의 친위대와 2000~3000명의 튀르크 용병들만 셀주크 군에 포위된 채 싸웠다.

어느 순간, 전장에는 황제 혼자만 덩그러니 적군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일부 비잔틴군이 황제를 발견하고 달려갔지만, 셀주크군이 나타나자 그마저 도망치고 말았다. 로마누스는 부상을 당했고, 셀주크군의 포로가 되어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술탄은 자리에서 일어나 로마누스의 목에 자신의 신발을 묶고 땅에 입을 맞추게 했다. 튀르크족이 승리를 축하하는 의식이었다.

술탄은 황제를 일주일간 포로로 붙잡아 두며 정중하게 대접했고, 전투 전에 제안한 평화조약을 다시금 꺼내 들었다. 이미 포위된 안티오키아, 에데사, 히에라폴리스와 만지케르트를 양도하라는 것이었다. 로마누스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풀려났다.

그러나 그 사이에 비잔틴 제국은 황제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에 요하네스 두카스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로마누스는 전쟁에서 굴욕스럽게 패했다는 이유로 제국에서 더 이상 황제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 길로 쫓겨났다. 그 결과 술탄과의 협상은 무산되고, 비잔틴 제국은 셀주크 튀르크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작품 속으로


작품의 배경은 만지케르트 구릉이다. 전쟁의 시점이 한여름인 8월 26일이지만, 모든 생명이 죽은 듯 배경은 흙빛이다. 몇몇 포로들과 함께 황제만 덩그러니 술탄과 적에 둘러싸여 있다. 앞의 주인공들 외에 주변은 멀건 가깝건 모든 것이 피폐할 뿐이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Bataille de Manzikert), 이스탄불 군사박물관, 터키.





김혜경 (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 김혜경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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