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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의 ‘카롤링거 르네상스’, 오늘의 유럽을 만들다

샤를마뉴의 ‘카롤링거 르네상스’, 오늘의 유럽을 만들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4)장 빅토르 슈네츠의 ‘알쿠이노를 접견하는 샤를마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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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3 발행 [1577호]
▲ 장 빅토르 슈네츠, ‘알쿠이노를 접견하는 샤를마뉴’(1830년), 파리, 루브르 소장.



2018년 월드컵 축구가 러시아에서 열렸다. 이탈리아는 지역 예선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본선에 참가조차 못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결승까지 올라가 크로아티아를 4:2로 누르고 최종 우승의 영예를 누렸다. 그 모든 과정에서 이탈리아는 한 번도 이웃 나라인 프랑스를 응원한 적이 없다. 그만큼 두 나라는 서로를 싫어하고 잘못되면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기류가 큰 것이 사실이다. 1500년간 유럽의 역사 속에서,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 시에 서로에게 총을 겨누었던 탓도 있지만, 여기에는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탈리아 입장에서 볼 때 프랑스는 프랑크, 곧 북방 야만 민족 중 하나였다. 그런 민족이 종교와 언어와 법률을 모두 로마에서 받아들여 ‘문명’을 가진 민족으로 재탄생하였다. 프랑스의 뿌리를 아는 로마, 곧 이탈리아는 그것이 꼴 보기 싫은 거고, 프랑스는 로마 제국을 쫄딱 망하게 만든 별 볼 일 없는 반도가 기껏 살려주었더니 이제 와서 우리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과거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꽃을 피웠던 문화가 제국의 멸망과 이민족들의 난입으로 꺼져가는 것을 다시 살려, 이민족들이 일으킨 왕국들에 전수한 일등공신으로 자처하는데, 그것을 전 유럽이 인정하는데, 로마만 무시한다고 울먹이는 것이다.

이번에는 프랑크 왕국이 어떻게 유럽의 종주국이 되었는지, 그들이 이룩한 문화적인 업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일상적인 주제를 고전적으로 그려내다

소개할 작품은 프랑스 출신의 화가 장 빅토르 슈네츠(Jean-Victor Schnetz, 1787~1870)가 그린 ‘알쿠이노를 접견하는 샤를마뉴’이다.

슈네츠는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제자며, 테오도르 제리코(Thodore Gricault)의 친구다. 낭만주의에 입각한 신고전주의와 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동경했던 이탈리아에서 오래 머물렀고, 로마에서 프랑스 아카데미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빌라 메디치에 초대된 젊은 예술가 중 눈에 띄는 경력을 이룩한 사람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슈네츠는 작업실 안에서 박제된 형태의 모델보다는 자연과 인간의 현실과 일상의 장면들을 화폭에 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로마시의 허락으로 외곽에 거주하는 유목민과 집시촌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의 현실을 화폭에 담았다. 동시에 ‘지중해’ 생활의 풍경과 인물들을 그리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민간의 신심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연구했고,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은 상당했다. 공개적으로 서로 다투었는데, 비록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슈네츠 덕분에 둘의 상반된 견해가 심도있는 회화에 대한 지식으로 화해를 모색하기도 했다. 그는 평범한 방식으로, 농부와 전사(戰士)들의 일상적인 주제를 고전적인 방식으로 그려냈다. 이런 방식이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1841~1846년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 원장을 지냈고, 1870년에 파리로 돌아가 83세에 사망했다.



다양한 학문과 예술이 꽃피우다

그림 속 이야기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메세나 운동으로 다양한 학문과 예술이 꽃을 피웠던 것처럼, 샤를마뉴로 인해 오늘날 유럽이라고 일컫는 곳에서 고전이 꽃을 피운 것과 관련이 있다. 역사는 이것을 ‘카롤링거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라고 부른다. 카롤링거 왕조의 카롤루스(샤를) 시대에 일어난 라틴 문화, 즉 고전의 부흥 운동이다.

이 운동은 샤를이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모두 평정하는 과정에서 로마 문화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던 지역들을 접수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샤를이 야만 민족들 사이에서 탄생하는 성직자들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시작한 순수한 교회 운동이었다. 도처에서 ‘라틴어 사투리’(오늘날 유럽어의 기원이 되는 ‘로망스어’)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성직자들에게 정확한 원래 라틴어와 라틴 지식을 전수하려는 목적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고전의 부활이었고, 유럽 전역에서 라틴 문화가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마뉴(magnus), ‘위대한’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영토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지켜내며 체계적인 행정 제도를 도입하여 제국을 안정시키고 문화와 예술이 융성하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교황에게 약속한 대로, 그리스도교의 확산을 위해 도처에 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지었고, 거기에 딸린 학교와 병원 등을 지어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학문을 전수하고 연구하도록 했다. 프랑크 왕국은 물론, 주변의 여러 왕국에서 저명한 학자들을 초청하여 제국 내 학문을 장려하고 학자들을 양성하였다.

카롤링거는 교황뿐 아니라 성 베네딕도 수도회와도 깊은 관계를 맺으며 제국 내에 수십 개의 대수도원을 지었고, 교양 있는 성직자들을 왕궁에 모셔 왕실 자녀들의 교육에 힘썼다. 이를 모델로 각 지역에서도 성당과 수도원을 짓고, 백성들을 교육함으로써 지역 문화의 산실로 자리매김하도록 했다.

샤를은 건축, 미학, 문학, 시 등 다양한 문화 분야에서 참되고 진정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왕국의 도처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불러들였다. 요크지방에서 태어난 앵글로색슨족 출신인 알쿠이노, 롬바르드족 출신의 파올로 디아코노, 피사 출신의 문법학자 피에트로, 아랍인들이 스페인을 침입하자 도망쳐 온 고트족 사람 테오돌포 도르레앙스 등이다.

탁월한 문법학자들의 변증법적인 수사학은 당시 궁정에서 발전하고 있던 여러 정책에 힘을 실어 주었다. 샤를은 여러 학문을 통해 기존의 인식을 심화할 수 있는 것들에 큰 흥미를 느꼈다. 그가 일으킨 문예 부흥에 힘입어, 수사학과 문법, 논리학과 음악, 기하학과 수학, 천문학을 ‘일곱 가지 자유 학예(septem artes liberales)’로 자리를 잡게 함으로써 중세 교육의 근간이 되게 했다.

그가 읽기와 쓰기를 거의 하지 못했다는 것은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당시에는 읽고 쓰는 것을 하위 계급에 맡겼기 때문에 그 일은 귀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활동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문화는 구전으로, 개인의 기억으로 전수되었던 것이다.



작품속으로

한편 샤를은 문화 분야만 후원한 것이 아니라 전례와 성경의 텍스트를 확립하고 표준화하며, 고전 라틴어의 사전적이고 문법적인 유려함과 정확함을 취합하여 글쓰기 양식을 장려하기도 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요크의 알쿠이노(Alcuino, 735~804)는 그 선두에 섰던 학자였다.

그는 샤를의 지시에 따라 텍스트를 편집하고, 학사 일정을 마련하여 복사들을 위한 수업을 진행했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그는 직접 개발한 서체로 필사한 것들을 샤를에게 보여주고 있다. 황제를 둘러싼 인물들은 실로 다양하다. 왼쪽 앞에는 검은 피부의 학자들이 있고, 그 뒤로 황제의 사람들로 보이는 군인들, 오른쪽에는 터번을 쓴 아랍 학자들과 대상 상인들 및 여러 계층의 성직자, 수도자들이 그룹별로 채워져 있다.

샤를은 제국을 내외적으로 아름답게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국방을 튼튼하게 하고 국토를 확장하며 도시를 재정비하는 한편, 문화와 예술, 학문을 장려함으로써 중세를 암흑이 아니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김혜경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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