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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샤를에게 황제의 관을! 그리스도교 왕국의 탄생

프랑크 샤를에게 황제의 관을! 그리스도교 왕국의 탄생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3)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쿨바흐의 ‘샤를마뉴의 대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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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6 발행 [1576호]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쿨바흐, ‘샤를마뉴의 대관식’, 막스밀리아늄(바이에른 의회 궁), 독일 뮌헨.



800년 성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예순 남짓의 남성이 엄숙한 자세로 들어가고 있었다. 체구가 큰 것으로 봐서 북쪽 지방에서 온 사람으로 보였다. 거대한 덩치는 전사의 몸에서 풍기는 불굴의 힘을 표현하는 것 같고, 흰 머리카락과 수염은 고상한 인품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예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 수가 있었다. 프랑크 민족을 이끄는 왕 샤를(이탈리아어 카를로, 영어 칼)이었다.

한겨울의 추운 날씨지만 대성전을 채우고 있는 분위기는 감동적이고 따뜻했다. 왕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흠숭하며, 자신의 잘못에 대해 자비를 청했다. 동정녀 마리아께 전구를 청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역시 몸에서 풍기는 인품과 성품이 남달랐다. 훗날 ‘성인’ 교황으로 불리게 될 레오 3세였다. 어떤 학자들은 “왕이 미사 도중 기도에 몰입해 있는 사이, 성 베드로의 ‘고백의 제단’에 있던 레오 3세 교황이 그에게 다가가 머리에 관을 씌워주었다. 관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기존의 ‘왕’의 것이 아니라, ‘황제’의 것이었다”고 말했다.



초상화 작가이며 역사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독일의 초상화 작가며 역사 화가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쿨바흐(Friedrich August von Kaulbach, 1850~1920)가 그린 ‘샤를마뉴의 대관식(Krnung Karls des Großen)’이다.

그는 하노버의 궁정화가로 역사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던 테오도르 쿨바흐(Theodor F.W.C. Kaulbach, 1822~1903)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한테서 그림을 배웠고, 후에 뉘른베르크 쿤스트게베베슐레에서 아우구스트 폰 크렐링(August von Kreling)의 제자가 되었다. 이 학교는 뒤에 뉘른베르크 벨레아르테 로얄 아카데미가 되었다. 그는 한스 홀베인(Hans Holbein)의 작품을 모방하기도 했다. 1871년, 바이에른 주 뮌헨으로 이주했고, 후에 프란츠 폰 렌바흐(Franz von Lenbach)와 프란츠 폰 스턱(Franz von Stuck)과 함께 뮌헨학파를 정의하는 그룹의 멤버가 되었다. 초상화 작가로 경력을 쌓았기에, 독일 제국은 물론 미국에서까지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거나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 꽤 인기 있는 초상화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쿨바흐는 파리를 여러 차례 여행했고, 그래서일까, 19세기 말 프랑스 화풍을 연상케 하는 작품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1886년 바이에른의 뮌헨 벨레 아르테 아카데미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작품은 그의 역사 주제의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유럽 전체에 미친 샤를의 영향력

작품 속에 등장하는 샤를은 로마 교황의 요청에 따라 북쪽에 있는 야만 민족들의 왕국에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유럽의 일치를 유지해 달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이것은 프랑크 왕국의 설립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역대 프랑크 왕들의 공통된 사명이었다.

700년대 중ㆍ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프랑크 왕국의 왕은 이미 아키텐과 롬바르드족을 정복했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아랍인들의 위협을 받고 있던 스페인까지 평정했다. 색슨족과 바이에른족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아바르족과는 전쟁 중에 있었다.

샤를은 단순한 전사가 아니었다. 그의 영향력은 유럽 전체에 예술과 학문을 꽃피게 했다. 카롤링거 문예 부흥은 그의 시절에 일어났다. 그의 존재는 그 자체로 사랑받는 주제였고, 전사들은 그를 존경했으며, 그리스도교의 유익한 것들을 정복하는 땅으로 확장시켰다.

이에 성 레오 3세 교황은 샤를의 머리에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고, 과거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영토지만 더 이상 이교도의 로마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샤를 역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아니라, 성경에서 정의한바 왕 중의 왕, 군주들의 군주의 지상 대리자가 영광스럽게 부여한 칭호를 받았다.

로마의 백성은 “샤를 아우구스투스, 위대한 하느님으로부터 관을 받으신 분, 로마인들의 평화의 황제께”라고 환호했고, 프랑크 민족은 칼과 창을 세워 두드리며 “성탄! 성탄!”이라고 소리쳤다. 클로비스 시대부터 이어온 환호였고, 프랑크 민족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다시금 입장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가 있는 성 베드로 좌(座)에서 그 해 성탄, 중세 그리스도교 문화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서구 가톨릭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800년 전 같은 날,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것처럼.

어떤 역사 비평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로마 교회를 설립하시면서 그 안에 큰 문명을 일으킬 씨앗을 하나 마련해 두셨는데, 그것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8세기 동안 민족들의 회개와 교회의 확장으로 씨앗은 발아될 준비를 마쳤고, 마침내 때가 차서,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한 성인의 손에 의해 샤를의 제국에서 축복과 인정으로 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샤를마뉴의 대관식 1200주년을 기념하며 “위대한 역사적 인물, 샤를마뉴 황제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뿌리를 상기시키며, 당면한 인간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분야에서 문화적인 개화를 이루었습니다. 연구자들이 그 시대를 연구하는 이유입니다. 유럽은 자기 정체성을 연구해야 합니다. 유럽은 샤를마뉴가 남겼고 1000년 이상 보존되어 온 문화유산을 되찾으려는 힘찬 노력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며 과거 서로마 제국의 거의 모든 영토를 회복함으로써 로마 제국을 기억하는 유럽인들에게 과거의 영광을 느끼게 해 준 인물이었다. 그는 새로 개편된 유럽의 지형학적 구도에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토대로 법과 문화와 예술을 복원했다. 쇠퇴와 혼란이 거듭되던 시대에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유럽을 세운 설립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를 철저하게 수호한 황제로 인해 서구는 처음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했고, 그리스도교와 로마를 하나로 인식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샤를의 대관식은 1000년 이상 그리스도교 지배를 의미하며, 그것의 보편적 타당성을 입증하는 공적이고 상징적인 행위였다. 권위의 원천은 지상에서 하느님의 대리자가 주관한다는 데 있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권위는 지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샤를의 대관식은 그리스도교 왕국의 탄생이자 그리스도교 문명의 재건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작품 속으로

장소는 성 베드로 대성전이고, 시점은 밤이다. 주님 성탄 전야 미사의 중간에 교황은 샤를에게 도유를 하고 ‘황제’로 칭하며 관을 씌워주고 있다. 그리고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도 부여하고 있다. 오른쪽 앞의 기록관은 이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의 부활이 선언되었다.

왼쪽 군중 사이의 한 군인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순간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오른손을 들어 “저 사람을 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샤를의 대관식은 로마를 조상으로 둔 유럽에서 프랑크 왕국의 통치권을 분명히 하고, 로마 그리스도 교회와의 유대를 강화하는 동시에 향후 유럽 국가들의 이상적인 통치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쿨바흐, ‘샤를마뉴의 대관식’, 막스밀리아늄(Maximilianeum, 바이에른 의회 궁), 독일 뮌헨.





김혜경 (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 김혜경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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