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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의 창궐… “주님, 저희를 돌보소서”

전염병의 창궐… “주님, 저희를 돌보소서”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장면] (10)세바스티아노 리치의 ‘성모 성화 앞에서 기도하는 그레고리오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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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9 발행 [1573호]
▲ 세바스티아노 리치, ‘로마에서 페스트의 소멸을 위해 성모께 비는 그레고리오 교황’(1700년), 캔버스 유화, 파도바의 성녀 유스티나 대성당.



코로나19로 팬데믹이 선포되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2020년 3월 27일, 그날 하루 이탈리아의 사망자 수는 969명에 이르렀다. 최악의 날, 인류의 짐을 노쇠한 어깨에 짊어지고 혼자 ‘십자가의 길’을 바친 후, 힘겹게 계단을 오르신 다음 텅 빈 광장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으시던 프란치스코 교황을 우리는 기억한다. 너무도 처연했던 그 장면은 역사에 그대로 새겨졌다.

‘격리’를 영어로는 쿼런틴(quanrantine), 이탈리아어로는 ‘과란테나(quarantena)’라고 한다. ‘40일간’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딱 들으면, 척하고 알아듣는 말이다. 이 말은 교회 전통에서 나왔다. 중세, 근거를 알 수 없고 종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면 교회는 일체의 모든 행위를 중단하고 40일간 기도와 참회를 권했다. 당시로선 전염병이 돌면 사회사업과 의료사업,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돌보던 수도자들이 가장 먼저 희생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우리 시대의 코로나 앞에서 교회가 겪었던 최초의 페스트 팬데믹에 대해 다뤄 본다.



페스트 팬데믹과 기도 행렬

약 1430년 전인 589년 펠라지오 2세 교황 시대, 한 척의 배가 이집트에서 오스티아 항구로 들어온 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징벌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페스트’, 흑사병의 시작이었음을 안다. 서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이민족이 대이동하는 가운데 터져 나온 일이었다. 그 결과 겨우 붙어있던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명줄은 완전히 끊어지고 제국으로서의 로마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사망자는 1000만 명이 넘었다. 당시로선 엄청난 희생이다. 희생자 중에는 교황도 있었다.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성사를 준 탓이다.

이듬해인 590년, 후임으로 선출된 성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에 3일간 기도와 단식과 참회의 행렬을 생각했다. 성직자 수도자는 물론 로마 시민 모두를 초대했고, 시민들 역시 절박한 심정으로 행렬에 참여했다. 그 유명한 ‘페스트 극복을 위한 성체 행렬’이었다. 이후 역사 속에서 큰 위기가 닥칠 때마다 성체는 감실을 나와 백성들 사이에서 행렬했고, 교회 전통이 되었다.

성모 마리아 대성전에 모셔진 성 루카의 성모 성화를 로마인들은 ‘로마인들을 구하는 어머니(Salus populi Romani)’로 부르고 공경해왔다. 성화(聖畵)가 행렬의 선두에 섰다. 7개 그룹으로 나뉘어 임무가 주어졌고, 백성은 한마음으로 로마시를 횡단했다. 라테란의 요한 대성전을 출발하여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향했다. 성직자 수도자는 물론 귀족과 백성 그룹이 밤낮으로 기도하며 행렬을 이어갔다.

로마 시내 동과 서를 가르는 테베레 강에 이르렀다. 엘료(Elio) 다리(당시에는 ‘하드리아누스 다리’라고 부름)에 왔을 때, 교황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 꼭대기에서 미카엘 대천사가 칼을 칼집에 꽂는 환시를 보았다. 행렬에 참여한 백성들도 모두 직간접적으로 그것을 감지했고, 팬데믹이 곧 물러갈 거라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후, 교황의 명에 따라 천사가 나타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 꼭대기에는 대천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치열하고 극적인 삶을 산 화가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행렬을 앞두고 ‘성모 성화 앞에서 기도하는 그레고리오 교황’이다. 후기 바로크 시대, 베네치아 학파에 속해 있던 세바스티아노 리치(Sebastiano Ricci, 1659~1734)가 그린 것으로, 파도바에 있는 성녀 유스티나 대성당 내 그레고리오 경당의 제단화다.

베네치아 근처 벨루노 마을에서 태어난 세바스티아노 리치는 12살 무렵인 1671년부터 베네치아로 가서 페데리코 체르벨리와 세바스티아노 마쪼니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하며 그림을 배웠다. 1678년 리알토에 있던 한 공방에서 일할 때, 두 명의 소녀를 임신시킨 일이 있었다. 한꺼번에 두 명이라, 그중 나이가 어린 안토니아 베난치오를 죽이기로 하고 독약을 준비했다. 다행히 미리 들통이 나는 바람에 더 큰 죄는 면할 수 있었으나, 감옥행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름난 피사니 가문 식구로 추정되는 ‘어떤 귀족’의 도움으로 풀려나 볼로냐로 갔다. 볼로냐의 중앙시장 근처 성 미카엘 성당에 있으면서 ‘피렌체 성 요한 형제단’의 요청으로 그들의 기도소에 ‘요한 세례자의 탄생과 죽음’을 그렸다. 이 작품은 분실되었지만, 그로 인해 리치가 루카 조르다노의 베네치아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에 남긴 작품들과 비교하여, 그로부터 배웠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후 볼로냐, 파르마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던 중, 과거 자기가 죽이려 했던 안토니아 베난치오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동안 안토니아는 딸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딸과 아내를 버리고, 화가 페루찌니의 딸 막달레나와 토리노로 도망쳤다. 즉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파르마의 공작 라누쵸 파르네세가 개입하여 무사히 풀려났다. 그리고 로마, 밀라노를 다니며 작품을 남겼다. 몬자대성당 내 테오돌린다 제단화(1697년)와 파도바의 성녀 유스티나 대성당 내 그림(1700년), 다시 로마와 비엔나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했다. 1734년 베네치아로 돌아와 안토니아에게 모든 유산을 물려주고 죽었다. 치열하고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다양한 모습들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최초의 대규모 자선사업을 벌인 대교황

제단화 ‘성모 성화 앞에서 기도하는 그레고리오 교황’은 1699년 제단이 만들어지자마자 그리기 시작하여 이듬해 8월 24일에 완성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같은 대성당 내 ‘거룩한 성체의 소성당’ 천장에도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천사들의 영광을 받으시는 성부 하느님, 사도들에게 현시되는 성체, 믿음-희망-사랑의 세 가지 덕목’이 주제다.

작품의 내용과 관련한 교회사적인 측면은 성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의 업적 중 하나기도 하다. 그는 ‘대(大)’ 교황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업적을 남겼다. 앞서 베네딕토 성인의 생애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수도생활을 경험한 최초의 교황이었고, 그레고리오 성가를 집대성했으며, 이민족들의 이동으로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에 세워진 새로운 왕국들에 선교사들을 파견했다. 학자며 사목자로서 최초의 「성사집」과 「사목 규범」 등 엄청난 양의 신학서, 사목서 등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백성의 입장에서 가장 큰 업적은 롬바르드족의 장화반도 침입으로 북쪽에서 로마까지 밀려 내려온 피난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최초의 대규모 자선사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의 자선사업의 배경에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 담겨 있었다. 모든 재산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고, 교회는 단지 그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인이라는 생각이다. 오늘날 사회교리에서 이야기하는 이 가르침은 부자들의 양심을 건드렸다. 부자들을 향해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지상의 재화는 모든 사람과 나누어 사용해야 하는 것이기에 혼자만 움켜쥐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설교했다. 로마의 부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앞에서 저지른 죄를 용서받기 위해 교황에게 재산을 기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게 했다.

백성의 신임과 지지를 크게 받은 성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은 롬바르드족을 개종시키고 그들의 위협으로부터 백성들을 지켜내는 한편,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장화반도에서 교황의 영지를 확보하고, 그때까지 황제가 교황을 임명하던 관행을 바꾸어 잊힐 뻔했던 교황의 수위권(首位權)을 되찾아 왔다. 서유럽에서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을 확실하게 굳힌 최초의 교황이라고 하겠다.



작품 속으로

성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은 아기를 안은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완전한 의탁을 의미하듯 팔을 벌려 간절히 청하고 있다. 표정과 눈빛이 절박하다. 한 손은 위를 향하고 다른 한 손은 희생당하는 자녀들을 보라는 듯 아래로 향하고 있다. 그의 시선은 아기를 안은 마리아를 향하고, 발밑에는 온몸이 염증으로 뒤덮인 병자가 널브러져 있다. 병자 옆에는 마리아의 모성을 자극하는 듯 어린아이들이 죽은 어미 위에서 울고 있다.

왼쪽 저 멀리 배경에는 로마의 판테온이 보이고, 그 옆으로 행렬하는 사제단이 있다. 교황이 전례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봐서 전례를 거행한 후 백성의 중개자로서 즉각적인 조치를 호소하는 것 같다.



세바스티아노 리치, ‘로마에서 페스트의 소멸을 위해 성모께 비는 그레고리우스 교황’(1700), 캔버스에 유화, 파도바의 성녀 유스티나 대성당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 김혜경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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