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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6) 자코포 주키의 ‘눈의 기적’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6) 자코포 주키의 ‘눈의 기적’

한여름에 눈 내린 기적의 언덕에 성모 마리아 대성전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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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1 발행 [1569호]
▲ 자코포 주키, ‘눈의 기적’, 1580년경, 피나코테크, 바티칸박물관, 로마.



로마에는 4대 대성전이 있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전,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전과 성모 마리아 대성전이다. 이 가운데 성모 마리아 대성전은 서방 교회에서 처음으로 성모님께 봉헌된 대성전이다. 예수회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외 사목 방문의 시작과 마무리를 이 대성전을 찾아서 한다.



성모 마리아 대성전

바로 이 대성전을 짓게 된 동기가 오늘 소개하려는 작품에 담겨있다.

로마인들은 성모 마리아 대성전 건축과 관련한 역사, 기적, 전설 등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8월 한여름에 눈이 왔다는 것이다. 8월 4일과 5일 사이 밤에 눈이 내렸는데, 그것도 도시 전체가 아니라 대성전이 세워진 에스퀼리노 언덕 꼭대기에만 소복이 왔었다고 한다.

이야기인즉, 4세기 말 로마에 요한이라는 한 귀족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도록 자식이 없자 재산을 물려줄 곳이 없어 부인과 상의 끝에 성모 마리아께 성당을 하나 지어 봉헌하고자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차에 꿈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구체적인 장소를 말해 주었다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부부는 꿈이 이상해서, 평소 친분이 있던 리베리우스 교황을 찾아가 꿈 이야기를 했다. 말을 듣던 교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자기도 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다 함께 마리아가 꿈에서 알려 준 장소로 가보니, 눈이 하얗게 덮여 있더라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에스퀼리노 언덕, 지금의 대성전이 있는 자리다. 교황은 즉시 자신의 목장(牧杖)으로 눈이 내린 곳에 선을 그었다.

소개하는 작품은 바로 그 순간을 그린 것이다. 그것을 라틴어로 ‘ad Nives’(앗 니베스)라고 한다. ‘눈’이라는 뜻이다.

이 기적 이야기는 매년 8월 5일, 대성전 광장에서 하얀 꽃잎을 뿌리는 행사로 기념한다. 로마인들은 대성전을 ‘리베리우스의 성모 마리아’라고도 하고, ‘앗 니베스(눈)’라고도 한다.

첫 공사는 352년, 귀족 요한의 봉헌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대성전의 모습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를 기점으로 개축된 결과다. 교회사에서 에페소 공의회는 성모 마리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한 공의회다. 신성과 인성을 갖춘 그리스도의 어머니, 곧 ‘하느님의 어머니’ 교리를 선포한 공의회다. 로마에서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이 대성전은 에페소 공의회를 기점으로 432~440년, 성 식스토 3세 교황의 뜻에 따라 증ㆍ개축되어 ‘성모 마리아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자코포 주키

그림을 그린 자코포 주키(Jacopo Zucchi, 1541~1590)는 후기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출신의 화가다. 그는 피렌체와 로마를 오가며 활동했고, 매너리즘적인 화풍과 함께 과거의 고전적인 화풍을 추구하며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준 화가였다. 조르조 바사리의 제자로 더 많이 알려진 화가다.

그는 바사리 밑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바사리가 피렌체의 베키오 궁 내 프란체스코 1세 스투디올로와 500인실의 벽화를 그릴 때 참여하기도 했다. 1570년 12월 바사리를 따라 로마로 와서 성 비오 5세 교황의 요청으로 바티칸 궁전 안에 있는 여러 소성당(성 미카엘, 성 베드로 순교자, 성 스테파노)들을 장식하는 데 참여했다. 잠시 피렌체로 돌아가 500인실의 벽화를 마무리하고, 1572년부터 로마에 정착해 페르디난도 1세 데 메디치 추기경의 궁과 별장을 장식했다. 물론 로마 귀족들의 궁과 성당, 수도원에서도 많은 일을 했다.

그가 남긴 자취는 현재 로마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1590년대 초에 그린 마지막 작품은 코르소가에 있는 루첼라이 궁(지금의 루스폴리) 갤러리에 있다. 그는 1596년 초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느님의 어머니


작품과 관련한 교회사적인 측면은 ‘하느님의 어머니’ 교리가 선포된 에페소 공의회지만, 이것은 이전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이단 논쟁’과의 긴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거치면서 로마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자리 잡는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두 황제 이후, 제국은 점차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고, 신앙은 다양한 문화들 사이에서 혼선을 겪고 있었다.

교회 안에서 이단 문제는 이미 박해 시대에도 등장한 바 있었다. 영지주의, 말시온주의, 몬타누스주의 등이 나왔지만, 박해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교회를 위협한 것은 안의 문제보다는 밖의 문제가 더 컸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 이후 그 방향이 달라졌다.

그 대표적인 이단이 “성자는 성부와 똑같은 하느님이 아니라 성부에 의해 양자로 입양된 종속된 하느님”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와 그 뒤를 이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입장 논쟁이었다. 오늘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것은 후자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치릴로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있었다. 거기에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오랜 갈등도 있었다.

쟁점이 된 것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테오토코스(Η Θεοτοκοs,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이 문제를 풀려면 먼저 그분의 아들 예수님에 관한 신분부터 확실히 해야 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위격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고, 그 둘은 신격과 인격으로 독립되어 있다(이성설, 二性說)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신성은 만나지만, 인성은 육신을 통해 만나는데, 그것도 그분이 죽음으로써 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는 맞지만, 하느님의 어머니는 아니라고 했다. 예수의 죽음으로 인성은 끝났기 때문이다. 인성이 끝나면서 마리아와의 관계도 끝났다고 본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두 위격 중 인간적 위격만 낳았다는 것(크리스토토코스, Χριστοτκο, 그리스도의 어머니)이다.

이 주장은 큰 파문을 일으켰고,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치릴로는 즉시 반대 이론을 폈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신성과 인성으로 구별되지만, 하나의 위격으로 단일하다고 반박했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동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1년 에페소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공의회는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위격으로 존재하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다”고 선언했다. 안티오키아 주교들은 에페소 공의회를 따라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단죄를 받아들이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그리스도는 단일한 위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공의회 결정을 수용했다.

그러므로 에페소 공의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느냐 마느냐는 문제에서 시작하여 교리 면에서 큰 진전을 이룬 공의회였다. 공의회는 성자의 신성을 확인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재확인했고, 성령의 신성을 명시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이어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합쳐졌다는 교의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작품 속으로

그림이 소장된 바티칸박물관 피나코테크에는 자코포 주키가 그린 같은 제목의 그림이 두 점 있다. 두 작품은 예외적인 서술과 활기를 주는 색상 표현으로, 기존의 매너리즘에서 보는 형광색에만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흰색 하나만으로도 위치와 명도로 다양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음영은 이 역사적인 순간을 극대화한다.

눈에 띄는 것은 원근법과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관점이다. 원근법의 소실점은 저 멀리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듯하다가 위로 향한다. 마리아의 신분이 크리스토토코스에서 테오토코스로 승화되는 것을 표현한 것처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 김혜경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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