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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길 창창한 양반가 자제들, 천주학 공부에 동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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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7. 권철신과 주어사의 젊은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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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1 발행 [1569호]
▲ 감호수창첩에 실린 김원성의 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감호수창첩에 권철신의 아버지 권암의 인적 사항이 적힌 인장.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주어사 강학회 참석자들

1776년 5월 24일에 권철신은 홍유한에게 쓴 편지에서 이총억(李寵億, 1764~1822)과 이존창(李存昌, 1752~ 1801), 그리고 홍유한의 아들 홍낙질(洪樂質, 1754~1816) 등 십여 명의 젊은이가 공부에 동참했다고 썼다. 또 세 해 뒤인 1779년 주어사에서 열린 겨울 공부에는 김원성(金源星, 1758~1813), 권상학(權相學, 1761~?), 이총억,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참석했고, 뒤늦게 이벽(李檗, 1754~1785)이 합류했다. 두 모임에 모두 참석한 것은 이총억이다. 이존창과 권상학도 두 모임에 함께 참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주어사 강학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김원성은 권철신의 누이 안동 권씨의 사위이고, 권상학은 아우 권일신의 장남이며, 이총억은 이기양의 맏아들이자 권철신의 사위였다. 정약전은 권철신의 제자였고, 이벽은 정약전의 형 정약현의 처남이면서 권철신과 같은 이병휴의 문하였다. 혈족과 인척, 동문으로 얽힌 구성이었다.

1779년 당시 참석자의 나이를 보면, 권철신이 당년 44세, 김원성은 22세, 권상학은 19세, 이총억은 16세, 정약전은 22세, 이벽이 26세였다. 3년 전인 1776년 당시에는 이총억이 고작 13세였고, 이존창이 25세, 홍낙질은 23세였다.



권철신의 조카사위 김원성


주어사 강학회 참석자 명단에 첫 이름을 올린 이는 김원성이다. 그는 본관이 선산(善山)이다. 1789년에 간행된 「선산김씨세보(善山金氏世譜)」 권2에 그의 이름이 나온다. 그는 자가 윤구(潤九)다. 한양 조씨(趙氏) 정기(鼎基)가 안동 권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과 결혼했다. 조정기의 부인이 권철신의 누이였으므로, 김원성은 권철신의 조카사위가 된다.

국립중앙도서관에 「감호수창첩(鑑湖酬唱帖)」이란 것이 있다. 권철신의 부친 시암(尸庵) 권암(權巖)이 벗인 벽옹(癖翁) 홍한보(洪翰輔)와 동둔(東屯)이란 호를 가진 이와 함께 감호에서 뱃놀이를 하며 노닌 일을 십여 수의 시로 지은 것이다. 여기에 아들 권철신(權哲身)과 숙신(淑身), 제신(濟身) 및 김원성이 화운하여 합첩했다. 숙신은 넷째 아들 권득신(權得身)의 바꾸기 전 이름이다.

수창첩의 첫 면에 찍은 큰 도장은 인문(印文)이 이렇다. “안동 후인 권씨 암은 자가 맹용, 호는 시암, 병신년에 태어났다.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늙어서 감호의 남쪽에 은거하였다.(安東後, 權氏巖, 字孟容, 號尸庵, 生丙申, 有五男. 老以隱鑑湖南.)” 권철신 집안이 권암 노년에 감호의 남쪽으로 거주를 옮겼다는 뜻이다.

사람마다 도장을 찍은 이 아름다운 시첩에는 다섯 아들 중 셋째 아들 권일신(權日身)과 다섯째 권익신(權翼身)의 시는 없고, 외손녀의 사위인 김원성이 어린 나이로 참여해 2수의 시를 남겼다. 시의 수준이 상당히 높다.

한편 권철신이 1774년 1월 21일에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가 천진암 성지에 남아 있다. 이 편지 속에 김원성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 “김원성이 멀리로부터 와서 글을 읽는데, 문학이 먼저 번에 비해 많이 나아졌습니다. 벗이 찾아오는 즐거움이 없지 않으니 다행스럽지요. 하지만 흉년에 살림이 가난해 생활이 몹시 어려우니 어쩌면 좋습니까?(金郞源星, 遠來讀書. 文學比前多進. 不無朋來之樂, 可幸. 而但儉歲貧, 生活極難, 奈何奈何.)”

권철신의 조카사위였던, 당시 16살밖에 안 된 김원성을 홍유한이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김원성의 부친 김성흠(金省欽)의 부인이 홍유한과는 가까운 일족이었다. 김원성은 홍씨 부인의 소생이 아닌 양자로 들어간 아들이었다. 후에 김원성은 노선을 변경해 공서파(攻西派)의 일원이 되었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 당시에 성균관 학생으로 있으면서 진사 이용서(李龍舒) 등이 천주학을 배척하는 통문을 올릴 때, 이기경(李基慶, 1756~1819) 등과 함께 연명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안정복이 그를 칭찬한 글도 남아 있다.



권일신의 맏아들 권상학

두 번째로 나온 이름이 권상학이다. 아버지는 권일신이고, 어머니는 안정복의 3남 1녀 중 맏딸이다. 족보에 따르면 권상학은 자가 사보(思甫)이고, 부인은 홍유한과 가까운 일족인 풍산 홍씨 우보(羽輔)의 딸이다. 그의 생년은 1761년으로 추정된다.

권일신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다. 장남이 권상학이고, 차남은 상발(相發), 3남은 후에 권철신의 양자로 들어간 상문(相問, 세바스티아노, 1769~1801)이다. 권상문은 32세 때인 1802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고, 딸 권 데레사(1784~1819)는 조숙(趙塾)과 결혼하여 동정 부부로 살다가 1817년 3월에 체포되어 2년간 옥중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1819년 8월 3일에 부부가 함께 순교했다.(집안 관련 내용은 임성빈, ‘신유박해 이후 교회 재건기의 지도자 권기인 요한에 대한 연구’, 「교회사학」 <수원교회사연구소, 2011> 8호에 자세하다.)

권상문의 부인은 동복 오씨이다. 다산이 쓴 비전 묘지명의 5인 중 한 사람인 오석충(吳錫忠, 1742?~1806)의 딸이다. 동복 오씨 또한 시아버지 권철신에게 천주교리를 배웠다 하여 신유박해 때 사학죄인으로 형을 받고,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되었고, 그녀의 아버지 오석충은 1801년 3월에 권상학과 함께 임자도에 유배되었다가, 1806년 9월에 임자도에서 세상을 떴다.

권상학은 1785년 을사추조적발 당시, 아버지 권일신을 따라 이총억 등과 함께 추조에 들어가서 성상(聖像)을 돌려달라고 했던 5인 중 한 사람이다. 당시 이들은 자신들도 김범우와 함께 형벌을 받게 해달라며, “속히 육신을 버려, 영원한 천당에 오르기를 원할 뿐(惟願速棄形骸, 永上天堂)”이라고 하여 모두를 경악시켰다. 임자도로 귀양 간 이후, 그의 정확한 몰년과 죽은 장소 또한 분명치 않다. 당시 임자도에는 윤유일의 부친 윤장(尹)도 유배돼 있었다.



이기양의 맏아들, 권철신의 맏사위 이총억


이총억(1764~1822)은 이기양의 맏아들이자 권철신의 큰 사위였다. 자는 창명(滄溟), 1795년 식년시에 진사로 뽑혔다. 동생은 이방억(李龐億)이다. 두 형제는 모두 천주학을 믿고 따랐다. 1784년 12월 14일에 안정복이 권철신과 이기양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이제 듣자니 공이 경박한 젊은이들을 위해 서사(西士)의 학문을 창도하는 바 됨을 면치 못한다 하니, 과연 어찌하여 그런 것이오. 들으니 이가환과 정약전, 이승훈과 이벽 등이 서로 약속을 맺고 신학(新學)의 주장을 익혀 공부하며 어지럽게 오간다는 말이 있었소. 또 들으니 문의(文義)에서 온 한글 편지 중에 그 집안의 두 소년이 모두 이 공부를 한다면서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고 하더군. 이 어찌 크게 놀랄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벽위편」에 실려있다. 당시 이기양이 문의 현감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집안의 두 젊은이라 하면 이총억과 이방억을 가리킨다. 1784년에 쓴 편지니,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와 막 천주교가 태동하고 있을 시점의 일이다.

이 편지를 받고 격앙한 이기양은 막바로 안정복을 찾아갔다. 편지 속의 문의에서 보낸 한글 편지는 이기양의 어머니가 쓴 편지였다. 애초에 안정복은 이기양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손녀사위자 이기양의 친동생인 이기성(李基誠)에게 서학서를 못 보게 하라고 당부하면서 문제의 한글 편지를 증거로 제시했다. 아마도 이 한글 편지에 이기양의 모친이 손자인 이총억과 이방억이 천주학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기뻐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던 듯하다.

42세의 이기양이 74세의 안정복에게 “규방 안에서 일어난 일을 어째서 남에게 얘기합니까? 독서한 사람도 이렇게 합니까?”라고 따지며, 대체 무슨 화심(禍心)으로 어떤 재앙을 만들려고 이 같은 글을 보냈느냐고 앙칼지게 힐난했다. 이총억은 을사추조적발 당시 처삼촌 권일신을 따라 성상을 돌려달라고 찾아갔던 5인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을사추조적발 당시 주어사에 함께 있었던 세 사람 중 권상학과 이총억은 천주학에 깊이 연관되어 있었고, 김원성은 그 반대의 자리인 척사의 길에 들어서 있었다. 나머지 두 사람, 정약전과 이벽에 대해서는 따로 쓰겠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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