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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 반 다이크의 ‘테오도시우스의 성당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 반 다이크의 ‘테오도시우스의 성당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

학살 자행한 황제는 성당에 “못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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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4 발행 [1568호]
▲ 반 다이크, ‘테오도시우스의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 내셔널 갤러리, 런던



392년,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347~395)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그의 치세가 379년부터 사망하는 395년까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거의 치세 말기에 시행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테오도시우스의 죽음과 함께 로마 제국은 다시 동ㆍ서로 분리되고 영원히 이별하고 만다. 하지만 그가 추진한 강력한 그리스도교 부흥 정책은 이후 중세기를 예고하는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고 부흥시킨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대성당 출입을 금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바로 그 사건을 다룬 것이다. 루벤스 이후 가장 뛰어난 플랑드르 화가로 알려진 안톤 반 다이크(Antoon van Dyck, 1599~1641)가 그린 ‘테오도시우스의 성당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다.



안톤 반 다이크

작품은 1824년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측이 개인 수집가로부터 구입하였다. 저자 반 다이크는 오늘날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개인 공방을 운영할 만큼 패기 넘기는 화가였다. 그러다 루벤스(Peter Paul Rubens)를 만나면서 공방을 접고 그의 밑으로 들어가 공부했다. 루벤스가 “내 제자 중 최고”라고 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는 스승의 그림을 따라 그리며, 점차 스승을 넘어서는 감정 표현을 보여주었다. 스승이 격정적이고 화려하다면, 반 다이크는 서정적이고 섬세하고, 세련되며 우아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후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티치아노, 베로네세 등 베네치아 화풍을 연마하며 데생에 구애받지 않은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구도와 선미한 색채로 성경, 신화, 역사적 사건 등을 넘나들며 스승을 능가하는 재능을 보였다. 1620년 10월, 반 다이크는 21살에 영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영국과 유럽 대륙을 오가며 초상화 작가로 활동하다가, 1632년 영국으로 건너가 찰스 1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다. 초상화 분야에서 그는 과거 티치아노에 버금가는 명성을 떨쳤다. 그 결과 영국 화단은 물론, 17세기 유럽 바로크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반 다이크가 ‘테오도시우스의 성당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1619~1620년)라는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같은 제목의 그림을 몇 해 전(1617~1618년)에 스승이 그리는 것을 보며 도와준 적이 있었다. 당시 스무 살의 반 다이크는 루벤스의 작품들을 모방하는 것으로 공부하고 있었고, 거기서 특징적인 디테일에 주목한 바 있었다. 두 작품은 너무도 비슷해서 디테일을 보지 않으면 똑같은 것으로 착각하기에 십상이다.



테오도시우스와 암브로시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다음으로 공경받는 인물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때인 286년부터 약 1세기가 넘는 402년까지 제국의 수도는 밀라노였다. 그러니까 테오도시우스와 암브로시우스 시절의 밀라노는 제국의 힘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교는 두 파로 나뉘어 부딪히고 있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한 차례 정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파는 계속해서 교회를 흔들고 있었다. 그런 혼돈의 시대에 세례도 안 받고, 성직자 신분도 아닌 암브로시오가 집정관으로 양 진영의 중재자로 나섰다가 양쪽의 만장일치로 주교가 되었다. 주교가 된 후, 그는 아리우스파를 설득하여 정통 그리스도교로 전향하도록 하는 한편 전례와 성직을 공고히 하고, 교회의 사회봉사에 힘썼다. 전쟁 중에 발생한 환자들을 돌보는 데 교회를 적극 개방하여 민중의 지지를 크게 얻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도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380년,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 결정을 옹호하며, 자신이 병환 중에 바치던 니케아 신경을 모든 신자가 바치도록 칙령으로 발표하기까지 했다. 칙령에서 황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사람들을 ‘보편적 그리스도인’이라며, ‘가톨릭’이라는 말을 했다. ‘가톨릭’이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처음 문서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381년, 황제는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하여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그들의 집회를 금했다. 그리고 모두 정통 가톨릭교회로 개종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엄격히 금하고, 동ㆍ서로마에서 비그리스도교 의식을 모두 금하는 것은 물론, 제국의 전역에서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형태의 이교 숭배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테살로니카 학살

그런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부딪히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건은 390년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있었다. 주민 폭동이 일어났는데, 진압하던 로마군 수비대장 하나가 다툼 끝에 살해당하고, 분노한 주민들은 황제와 황후의 초상화까지 내려 흙탕물에 집어 던지며 모욕을 가했다.

밀라노에 있던 테오도시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군대를 보내 무차별적인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주민들의 말을 들어봐야 한다며 황제를 만류했지만, 황제는 이를 무시하고 테살로니카 주민 7000여 명을 모두 죽였다.

암브로시우스는 분개하며, 즉시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테살로니카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공식적으로 참회할 것과 당분간 성당 출입을 금했다. 그러나 황제는 여전히 주교의 말을 무시하고 부활절에 측근들을 대동하여 대성당으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암브로시우스는 성당 문 앞까지 나와 들어가려는 황제를 막았다. 단호한 주교의 태도에 황제는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해 성탄절, 테오도시우스는 다시 성당을 찾았고, 주교는 이번에도 입구에서 황제를 막았다. 진정한 회개와 통회, 보속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황제는 자신의 명령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머리에 베옷을 두르고 땅에 엎드려 용서를 청했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가벼운 보속을 주고, 성당 출입을 허락했다. 황제는 부활절에서 성탄절 전까지 성당 출입을 하지 못하다 성탄절이 되어서야 비로소 주교의 용서를 받고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지 불과 70여 년 만에 이루어진 것인데, 벌써 인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역사가들은 주교의 권위가 황제를 누를 만큼 성장했다며 교권과 속권이 부딪힌 첫 번째 사례로 도래할 종교와 권력의 관계를 암시한다고도 하고, 멀리 ‘카노사의 굴욕’을 예견한다고도 평했다.

하지만 이 사건 자체만 놓고 봤을 때, 이런 예단보다는 더 중요한 ‘교회가 국가 폭력에 침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주민들의 권리, 그들의 주장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지 강자의 힘으로 찍어 눌러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낸 것이다. 테살로니카 주민들의 인권과 생명권을 옹호하고 나선 최초의 행동하는 성직자였다. 이후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비록 더 먼 훗날, 교황이 권력의 중심이 되면서 퇴색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어도, 그 출발은 인간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것에 있었다.



작품 속으로

“못 들어갑니다.” 암브로시우스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반다이크는 포르치아나 대성당의 현관에서 맞닥트린 두 사람의 긴장감 도는 순간을 포착했다. 암브로시오 교부는 문 앞에서 손으로 황제를 저지하고 있다. 금색의 세련된 장식이 들어간 전례복을 입은 주교가 대성당으로 들어오는 황제를 막아선 것이다.

형태와 구성이 자유롭고 붓질이 넓으며, 톤이 약간 어둡다. 주교의 심리를 묘사하는 듯하다. 인물의 구성과 자세, 귀티 나는 의상의 질감 표현과 대조적으로 시선 처리는 매우 극적이다. 황제는 간절하고 주교는 단호하다. 두 사람의 미묘한 감정 표현이 탁월하다.





반다이크(Van Dyck), “테오도시우스의 출입을 막는 암브로시우스”, 내셔널 갤러리, 런던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피렌체 거주)

▲ 김혜경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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