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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 줄리오 로마노의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 줄리오 로마노의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교황, 로마의 실질적 통치권을 황제로부터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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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7 발행 [1567호]

▲ 줄리오 로마노,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일부, 1520~1524년, 프레스코, 바티칸박물관.



312년 로마의 밀비오 다리에서 막센티우스를 꺾고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316년에 발칸반도를 탈환하고, 324년에는 동로마의 리키니우스를 제패하여 동서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자기가 나고 자란 동로마의 비잔티움(Visantium)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지금의 이스탄불)로 개명하고, 제국의 수도로 지정했다. 이것은 로마를 제국의 모든 영토에서 공동의 뿌리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1000년 넘게 건재함으로써 로마 문화를 르네상스로 연결하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312년 밀비오 다리 전투 승전 후, 이듬해인 313년에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에 종교 자유를 선언했다는 것은 지난 호에도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가 이전의 황제들이 시행한 이분통치, 사분통치를 통해 경험한바, 비대해진 로마 제국의 중앙집권적인 통치의 한계를 절감한 데 따른 것으로, 더 이상의 박해보다는 오히려 제국의 통합에 활용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그 근거를 오늘 소개하는 작품의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
 

작품은 현재 바티칸박물관 라파엘로의 네 개 방 중 마지막 방인 ‘콘스탄티누스의 방’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방에 그려진 4개의 벽화 중 하나다. 1520~1524년, 클레멘스 7세 교황 시절에 라파엘로 학파의 여러 예술가가 참여한 가운데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 1492?~1546)가 중심이 되어 완성했다.
 

줄리오 로마노의 원래 이름은 줄리오 피피 데 얀누찌(Giulio Pippi de' Jannuzzi)다. 훗날 만토바에서 활동할 때, 로마 출신의 작가라는 뜻으로 ‘로마노’라고 불렸다. 그는 로마에서 태어나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시대를 살며 건축, 회화, 태피스트리의 밑그림, 조각, 은세공 등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했다. 바사리는 그와의 개인적인 친분을 들며 라파엘로 학파의 중심인물로 소개했다. 그가 라파엘로와 일하기 시작한 것은 1515년 전후로, 1520년 라파엘로가 사망하자 공방에서 주문받은 일들을 모두 물려받아 펜니(Gian Francesco Penni)와 함께 마무리했다고 전했다. 당시 공방에서 주문받은 대표작이 바티칸박물관의 ‘콘스탄티누스의 방’이라고도 했다. 후에 곤자가 공국의 로마 사절로 왔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주선으로, 1524년 줄리오 로마노는 만토바로 가서 죽을 때까지 일했다. 대표작이 만토바에 있는 팔라조 델 테의 장식이다. 이 궁은 건축, 조각, 회화 등 복합미술의 첫 번째 매너리즘 예술의 사례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과 의미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교회사에서도 팩트와 픽션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픽션이 많이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교회사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미술 작품이 많아 한 번은 짚고 넘어갈 문제라고 생각해 여기에 소개한다.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면서 로마를 비롯한 일부 서방의 영토를 실베스트로 1세 교황에게 기증했다. 기증문서에는 제국의 영토 중 다섯 지역(로마, 콘스탄티노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에서 교황은 최고 우위에 있고, 로마, 이탈리아, 그리고 서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의 휘장과 권한을 부여한다고 명시했다. 같은 문서에서 또 황제는 교황에게 라테란 궁도 증여한다고 했다. 이는 나병을 앓던 황제가 기적적으로 치유되자 그 보답으로 이루어졌다고 전하기도 했다. 서로마의 실권을 사실상 교황에게 준 것으로, 중세기 교황이 서방 세계에서 종교적인 권한만이 아니라 기증받은 영토를 다스려야 하는 이른바 속권(俗權)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후 콘스탄티누스가 보여준 정책들은 이 기증문서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많다. 집권 시기 전반에 걸쳐서, 그러니까 306~337년 직ㆍ간접적으로 그리스도교와 관련하여 많은 관용 정책을 폈다. 성직자들에게 과세를 면제하고, 제국의 최고 사형수들에게 행하던 십자가형을 폐지하며, 범죄자들에 대한 처벌 수단의 하나로 행하던 검투사 시합도 없앴다. 이교적인 희생 제사와 그 외 사람을 대상으로 행하던 부도덕한 이교 예식을 모두 금했다. 유언장을 수리할 권한을 교회에 부여했고, 주일 미사를 국법으로 정했다. 화려한 교회 건축물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로마의 라테라노 대성전,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전, 예루살렘의 주님 무덤 성당, 베들레헴의 주님 탄생 기념 성당, 콘스탄티노풀의 사도들의 성당과 성 소피아 성당, 트리어의 황제궁전의 2층 성당 등이 그것이다.
 

나아가 입법으로 교회를 국가에 편입하고, 사법상의 전권을 교황에게 위임했다. 그는 고대 로마의 국가 사제단에 속한 최고 사제를 가리키던 라틴어 명칭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를 교황에게 부여했다.
 

동시에 그는 교회의 일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 소집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리스도교로 방대한 로마제국을 통합하려고 했는데, 그리스도교 안에서 분열을 야기하는 이단적인 행위가 나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6월 19일 니케아(지금의 터키 이즈니크)에 있는 황제의 궁에서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시작되어 8월 25일 폐회될 때까지 약 두 달간 계속되었고, 318여 명의 주교가 참석했다. 공의회 결과, 황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아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추방했다. 그로 인해 분열된 교회를 통일하고, 로마 제국의 안정을 꾀했다. 그는 교회와 국가의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하는 한편 교회의 일에 세속의 지원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그 시발점이 된 셈이다. 중세기 교회는 서방에서 영토 문제에 관한 권리를 주장하고 보편적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기증문서를 활용했다. 기증문서는 1053년 성 레오 9세 교황이 찾아서 재차 소개하기도 했다. 1400년대 말,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은 이제 막 발견한 신대륙의 지배권을 두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논쟁에 자신의 개입을 정당화하는데도 이 문서를 인용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서방 세계 전체를 일컫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편, 기증문서에 대한 비판은 이미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신곡」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아, 콘스탄티누스여, 그대의 개종이 아니라 처음 부유해진 교황이 그대로부터 받은 봉물이 얼마나 큰 악의 어미가 되었던가!”(지옥편, 제19곡 115-117절)
 

이것은 교황에게 토지와 권력을 부여한 콘스탄티누스를 향한 명백한 독설이다. 이런 기조는 1440년 인문주의 학자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7~1457)에 의해 더욱 거세어졌다. 그는 이 문서가 위조라고까지 했다. 눈에 띄는 연대기 상의 오류와 4세기 이후에 나온 라틴어 사투리에 섞인 많은 야만적인 표현들을 사례로 들었다. 게다가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은 이 문서가 허위라는 것을 입증한다고도 했다. 로렌조 발라의 논문은 1517년 종교개혁자들이 다시 들고 나왔다.
 

로렌조 발라의 주장이 교회 안팎을 흔들던 바로 그때, 레오 10세 교황은 라파엘로에게 이 방의 벽화를 주문한 것이다. 알다시피, 레오 10세 데 메디치는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위한 대사 규정으로 종교 개혁의 불씨를 던진 교황이기도 하다.
 

 

작품 속으로
 

작품의 배경은 콘스탄티누스가 지은 옛 성 베드로 대성전을 연상케 하는 건물이다. 원근법이 들어간 기둥들 안쪽에는 반원형의 모자이크 안에 ‘만유의 구세주’가 묘사되어 있다. 그 아래는 성 베드로의 무덤인 듯 제단과 네 개의 나선형 기둥 장식이 있다. 교황은 사도좌에 앉아서 황제로부터 도금한 로마 여신상을 받고 있다. 신상은 로마에 대한 최고 통치권을 상징한다.
 

바사리는 그림 속에서 여러 인물의 초상화를 언급했는데, 오른쪽에서 두 번째 기둥 밑에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이 이 그림의 총책을 맡았던 줄리오 로마노라고 했다. 기둥들 맨 앞의 양쪽 두 개에는 글자가 적혀 있다. 왼쪽에 “그리스도를 고백함이 자유이고 합법이다”, 오른쪽에 “콘스탄티누스의 보호 아래 있는 교회”라고 적혀 있다.
 

 

 

김혜경 (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 김혜경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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