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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직현장에서] 낮아져라, 더 낮아져 바닥부터 보라

[사도직현장에서] 낮아져라, 더 낮아져 바닥부터 보라

조창운 수사(늘푸른자활의집 시설장, 그리스도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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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3 발행 [1562호]
▲ 조창운 수사



봄비가, 반가운 단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겨울 동안 메말라 있던 산과 대지를 촉촉하게 적신다. 봄비에 새하얀 목련꽃이 누렇게 변해 처참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떨어진다.

며칠 전 밤늦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 달 전까지 늘푸른자활의집에서 치료 프로그램을 하며 잘 지내던 20대 후반의 거주가족이었다. 그는 알코올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작정 뛰쳐나가서 영등포역 일대를 배회하며 또다시 술을 마시고 거리에서 지냈다. 그러다 친구의 도움으로 일을 하러 지방에 내려갔다가 술에 취한 사람에게 등과 어깨에 수차례 칼에 찔리는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정신을 차렸는데 병원비도, 옷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도움 청할 곳을 고민했고 전화를 하게 되었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전화를 받고 안타까운 마음과 여러 가지 감정이 밀려와 잠깐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게 수화기만 들고 있었다. 매년 성탄절 수호천사를 뽑는 행사에서 재작년부터 수호천사로 2년 연속 인연을 맺었던 그였기에 감정이 남달랐었다. 그는 병원비와 여러 가지 물품이 필요하다며 돈을 좀 부쳐달라고 했다. 우선 당장 필요한 물품들을 적어 문자로 보내라고 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그는 1년 동안 8번이나 늘푸른자활의집과 서울역 광장, 정신병원을 번갈아 가며 지독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었다. 지난해 8월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서울역 광장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술에 취한 그가 얼굴에 반창고를 붙인 채 눈을 감고 트로트를 구성지게 부르는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저려왔다. 그는 29살 청년이었다. 무엇이 그를 길바닥으로 내몰았던 것일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만의 개인의 병리적인 이유 때문만 인가? 전화해서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봄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꽃잎은 말없이 봄비를 맞으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더 낮아져라. 더 낮아져 바닥에서부터 바라보라고. 늘푸른자활의집 생활철학 15번째 ‘겸손하라’가 필요한 봄날이다.



조창운 예로니모 수사(그리스도 수도회, 늘푸른자활의집 시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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