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상처많은 아이들 사랑으로 품은 엄마들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상처많은 아이들 사랑으로 품은 엄마들

대구SOS어린이마을 어머니들을 만나다

Home > 기획특집 > 일반기사
2020.01.12 발행 [1547호]

▲ 어머니 양춘자씨가 세 딸과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서른한 살에 SOS어린이마을에 온 양씨는 지금까지 16명의 자녀의 어머니로 살아가고 있다.

▲ 어머니와 자녀들이 생활하는 집 내부. 일반 가정집과 다를 게 없다.





어머니 하면 무한한 사랑과 희생이 떠오른다. 하지만 부모의 이혼과 가정 생활고, 학대와 방임 등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존재한다. 그런 아이들을 어머니라는 이름과 신앙으로 품어주는 이들이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부모와 이별한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주는 SOS어린이마을 어머니들이다. 대구시 동구 해동로에 있는 SOS어린이마을을 찾아 어머니들의 무한한 사랑 속으로 들어가 본다.





왜 엄마를 이모로 불러?

“릿타가 일곱 살 유치원생일 때 엄마가 어느 날 급식 도우미로 갔는데, 한 남자아이가 잔뜩 긴장해서 오더니 ‘릿타 어머니, 나중에 커서 릿타와 결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거야. 그래서 속으로 그 마음 변하지 말라고 했지.”

햇살이 좋은 오후, 부엌에 모인 네 모녀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양춘자(파비올라, 56)씨가 중1이 된 릿타의 유치원 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엄마와 딸들의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서른한 살에 SOS 어린이 마을에 온 양씨는 지금까지 16명의 자녀를 키운 어머니다. 지금은 일곱 살부터 고3까지 6명의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양씨는 “원래 다른 시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TV에서 이곳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찾아왔다”며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살아보자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모든 일의 시작이 낯설듯 양씨 또한 엄마라고 불리는 게 한동안 낯설었다. 양씨는 “마을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운동회에서 아들이 처음 엄마라고 불렀을 때 너무 놀라 돌아보고는 얼어붙은 적이 있다”며 “스스로 엄마라고 수없이 되뇌며 적응하는 데 1년 정도 걸렸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어느 정도 커서 양씨와 만난 아이들 역시 처음에는 양씨를 ‘이모’라고 불렀다. 더 어린 동생들이 “왜 엄마를 이모라고 부르냐”라는 말에 어렵게 엄마라는 말을 꺼냈다고 한다.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양씨가 키운 아이 중에는 친부모에게 상처를 받아 오는 경우도 있다. 20여 년 전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아동 학대 피해자인 남자아이도 양씨가 키웠다. “아이의 코뼈가 내려앉고 두 번째 손가락이 짧았어요. 부모와 떨어져 병원에 한 달 가까이 입원하고 일곱 살 때 이곳에 왔죠. 그 아이가 지금은 스물여섯 살이 됐는데 얼마나 잘 커 줬는지 너무나 감사해요.”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서야 학대에 대한 상처를 털어냈다. 아들은 양씨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학대를 받았다. “새엄마가 아이를 빛도 안 드는 좁은 공간에 가두고 학대했다고 해요. 문틈으로 밖을 보면 부모들은 밥을 먹고 있고, 엿본다고 때리고 운다고 또 때렸다고 해요.”

양씨는 그날 아들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고 아들은 “이제 가족이 있으니 괜찮다”고 어머니를 위로했다. 양씨는 “심리 치료와 때에 따라서는 약물치료까지 해도 아이들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양씨의 자녀들은 “내가 친부모와 함께 못 사는 것은 안된 일이지만 이 가족의 일원이 된 건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이미 출가한 자녀도, 결혼을 앞둔 자녀도 자신이 자란 배경과 가족을 숨기지 않는다. 행여 자녀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말하지 말라고 해도 “엄마, 내 가족이 여기 있는데 어떻게 말을 안 하느냐”라고 말하는 자녀들이다.

양씨가 지난 11월 결혼한 딸 내외와 양씨, 자녀들이 전부 모여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부엌 벽 한쪽의 공간에 처음으로 가족 모두가 찍은 사진을 걸겠다고 했다.



평범한 가정의 오후

양씨 가정의 일상 역시 여느 가정과 다를 게 없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이 즐비한 선반, 장식장 위에 모셔진 성모상, 햇살 드는 마루에 화초들이 놓여 있다. 아들은 여자 친구에게 줄 선물을 산다고 외출했고, 사춘기에 들어선 딸들과는 화장 문제로 실랑이해야 한다. 때로는 학교에서 사고 친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한숨을 쉬기도 한다. 엄마로서 힘들거나 아이들과의 이견 조율이 쉽지 않을 때면 성장한 큰 언니, 오빠들이 중재자로 나선다. 요즘 애들도 화장은 기본이니 말리지 말고 좋은 화장품 사주라고 조언하고, 휴대전화 사용시간이나 공부시간 등도 조율하며 엄마를 돕는다. “아이들 사춘기가 무섭고 딸아이 사춘기는 더 무섭다고 하잖아요. 우리 집에 중 1, 2, 3학년이 다 있어요. 시대가 바뀌어 어른이라고 명령할 수도 없잖아요. 그래도 얘들이 결혼하고 아이 낳고 우울증 겪는 것보다 어려서 나랑 지지고 볶으면서 사춘기를 보내는 게 좋다고 해요”라며 활짝 웃었다.

“행복한 순간이요? 아이들이 집에 들어오면서 엄마하고 찾을 때, 엄마하고 안길 때 행복을 느끼죠. 기쁠 때가 있듯 슬플 때도 있고 화낼 때도 있죠. 그래도 내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산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양씨의 딸 전 오틸리아(22)씨에게 어머니께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엄마, 사랑해요”라고 수줍게 말한다. 양씨는 SOS어린이마을 어머니 역할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여러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며 “용기를 내야 하겠다는 생각보다 일단 온다면 하루하루 사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이미 어머니 역할에서 은퇴한 최해연 할머니는 자신이 키운 자식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한다.


어머니, 아낌없이 주는 나무
 

양씨와 같은 어머니들은 예순이 되면 아이를 양육하는 일에서 은퇴한다. 양씨가 생활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은퇴 어머니 숙소 문을 두드렸다.
 

최해연(마르타, 84) 할머니는 서른 살에 이곳에 와 19명의 자녀를 키우고 은퇴했다. 최 할머니는 “이제 아이는 키우지 않지만, 엄마한테 은퇴가 어디 있냐”고 했다.
 

테이블과 책장 등에 자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자리하고 있다. 얼마 전 아들에게 받은 사진첩을 펴는 최 할머니. 자녀들의 사진이 담긴 사진첩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는 “아이들 키우며 그때그때 기쁘고, 슬프고 했다”며 “IMF 때 힘들어하는 아이들 생각에 걱정을 많이 했다”고 했다. 부모가 나서서 도와줘야 하는데 도와줄 여력이 없어 더 마음 아팠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 했던가, 많은 자녀를 키운 최 할머니도 자식 걱정에 마음에 바람 잘 날 없었다. 큰딸은 세상을 떠났고 큰아들은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최근 공중파에서 화제가 된 김용현(요한, 67)씨는 최 할머니가 키운 큰아들이다. 김씨는 1987년 민주화 운동 등에서 정의를 부르짖었고,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서는 민간 구조대로 인명 구조를 위해 사투를 벌인 인물이다. 꿈많던 아들, 이상을 좇던 아들은 모진 현대사의 흐름에 맞서다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도 당했다. 몸도 마음도 상하고 산속에서 은둔자의 삶도 살았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이사장 유경촌 주교는 지난 12월 27일 특강에서 김씨를 성체성사의 삶을 실천한 인물로 꼽기도 했다.
 
 

최 할머니는 “아들이 도시에 나가면 답답해서 살 수 없다는 말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며 “남들은 아들이 대단한 일을 했고 훌륭한 아들 뒀다고 말하지만, 아들의 인생이 너무 고달팠다는 생각에 안쓰럽기만 하다”고 했다.
 

최 할머니는 지금도 아들 용현씨와 다른 자녀들을 위해 쉴 새 없이 기도한다고 했다. 그런 최 할머니에게도 작은 바람이 있다. “용현이가 요양원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며 자기 삶을 돌아보고 감사하며 살길 바라요.”
 

아들 용현씨와 다른 자녀들의 사진을 바라보는 최 할머니의 모습을 촬영했다. 최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부탁의 말을 건넨다. “세상에 아직 편견이 있으니까, 행여 아이들이 상처받을까 봐 아이들 얼굴은 안 나갔으면 해요.”
 

▲ 한국SOS마을 제1대 본부장을 지낸 이 프란치스코 여사(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SOS어린이마을 어머니들이 1995년 경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기념 촬영하고 있다



▲ 대구SOS어린이마을 전경.







한국SOS어린이마을 대표이사 이종건 신부

▲ 이종건 신부



“SOS어린이마을은 오스트리아에 국제 본부가 있고, 전 세계 136개국에서 아이들을 위해 일하는 NGO입니다.”
 

한국SOS어린이마을 대표이사 이종건(대구대교구) 신부는 “대구에 본부가 있고, 대구ㆍ서울ㆍ순천에 있는 3개의 마을에서 SOS어머니가 하나의 가정을 맡아서 가정별로 5~6명의 아이가 한가족이 되어 생활한다”며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그룹홈으로 운영되는 가장 가정에 가까운 양육을 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24명의 어머니가 활동 중이다.
 

SOS는 ‘Save Our Souls’의 약자로 ‘저희 영혼을 구해 주소서’라는 뜻이다. 어머니(모성애)ㆍ형제자매ㆍ집ㆍ마을 등 네 가지 운영 원리를 바탕으로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위한 사랑의 가정을 꾸린다.  
 

SOS어린이마을은 1949년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그마이너씨가 부모 없는 아이들이 가정적인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설립한 그룹홈 형태로 현재 유엔이 제시하는 대표적인 대안 양육 형태다. 한국에서는 SOS어린이마을 초대 이사장인 대구대교구 서정길 대주교와의 인연으로 1960년 오스트리아인 선교사 하 마리(Maria Heissenberger) 여사가 구두닦이, 넝마주이 소년들을 모아 돌본 것을 시작으로 1963년 한국SOS어린이마을이 설립되었다.
 

SOS어머니는 30대 전후에 마을에 들어와 평생 독신으로 살며 가정 안에서 상처받고 버림받은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할 때까지 사랑으로 양육하는 역할을 한다. 각 마을에는 60명 내외의 아이들이 보호ㆍ양육되고 있다. 만 0세부터 대학생까지 어른들의 보호가 필요한 전 연령의 아이들이 가정 단위로 생활한다.
 

이 신부는 “내 자식 키우기도 벅찬 세상, ‘누가 그런 무거운 짐을 지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 어머니가 은퇴해 공백이 생길 때쯤이면 기적처럼 또 다른 어머니 지원자가 나타난다”고 했다. 3~4년 가사 등을 도우며 어머니 수업 준비를 하는 이모들도 있다.
 

이 신부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의미와 삶의 가치를 깨닫고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분들이 많이 와줬으면 좋겠다”며 “여기는 어머니가 없으면 안 되는 곳”이라고 했다. “더 많은 분이 SOS어린이마을을 찾아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주길 기도합니다.”  
 

문의 : 053-984-6928, 한국SOS어린이마을 본부사무국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 가톨릭평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보기
첨부파일
발행일자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