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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24) 사울의 회심 (9,1-19ㄱ) <1>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24) 사울의 회심 (9,1-19ㄱ) <1>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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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발행 [1523호]
▲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하늘에서 번쩍이는 빛을 받아 말에서 떨어지는 사울을 그린 카바라조(1573~1610) 작, 사울의 회심,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안 체라시 경당.



예루살렘에서 집집이 들어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끌어다가 감옥에 넘기던 사울은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다마스쿠스로 떠납니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일이 생기고 그 일은 사울의 회심으로 이어집니다. 사울의 회심 이야기를 두 번으로 나눠 살펴봅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9,1-9)

사울은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합니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9,1-2)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을 향한 사울의 반감은 살기를 내뿜을 만큼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을 넘어서 다마스쿠스까지 박해의 손길을 뻗칩니다. 오늘날 시리아 수도인 다마스쿠스는 2000년 전에도 상업적으로 번창하던 도시였습니다. 당연히 유다인들도 많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후 66년 제1차 유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다마스쿠스에서 희생된 유다인들만 1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유다인들이 다마스쿠스에 살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면 다마스쿠스에는 유다인 회당이 한두 곳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대사제에게 다마스쿠스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요청합니다. 다마스쿠스의 회당들을 다니며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 곧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아직은 유다교와 완전히 결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마스쿠스에 어떻게 복음이 전해졌는지 사도행전 본문을 통해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이 박해로 흩어지면서 다마스쿠스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다마스쿠스에 많은 유다인이 살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새로운 길을 따르는 신자들이 다마스쿠스에 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까지 찻길로 320㎞ 남짓한 거리입니다. 2000년 전이라면 걸어서도 열흘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지요.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사울의 둘레를 비췄고 사울은 땅에 엎어지고 맙니다. 그때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이런 대답이 들려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줄 것이다.”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를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가 없었고 그래서 멍하게 서 있었다고 사도행전 저자 루카는 전합니다.(9,3-7)

그런데 여기서 잠시 살펴볼 사항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사울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세 번에 걸쳐 나옵니다.(9,1-19; 22,4-21; 26,9-18) 9장의 이야기는 저자 루카가 관찰자의 관점에서 전하고 있고, 22장과 26장의 이야기는 모두 사울(바오로) 자신의 입으로 증언하는 것을 루카가 소개하는 형식입니다.

문제는 회심의 결정적 계기가 되는 이 사건에 대한 설명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9장에서는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이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마 강한 빛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2장에서는 동행하던 사람들이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바오로는 말합니다. 반면 26장에서는 동행하던 사람들이 소리를 들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또 9장과 22장에서는 빛에 의해 엎어진 사람이 사울뿐인 것으로 나오는 반면에 26장에서는 사울과 일행 모두가 빛에 의해 엎어졌다고 나옵니다.

이렇게 사건에 대한 묘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혹시 루카가 지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쓴 사도행전에서 세 이야기가 이렇게 다른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놔두었다는 것은 오히려 루카가 자신이 전해 받은 자료에 충실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했는데 그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고 사도행전 저자는 전합니다.(9.8-9)

빛에 눈이 멀어서 사흘 동안 보지 못했다는 것은 사흘 동안 암흑 속에 지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기간에 사울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습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면 이는 마치 죽은 사람의 처지나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울은 사흘 동안 죽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알아보기

성경에서 빛이 번쩍이며 비추는 것은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가리킵니다. 번개가 번쩍이고(탈출 19,16), 빛이 뿜어 나오고(시편 18,13), 광채가 사방으로 뻗는(에제 1,28) 모습 등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남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타볼산에 올라 기도하시는데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옷이 하얗게 변한 것이나(루카 9,29)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말씀을 나누고 내려왔을 때 얼굴 살갗이 빛난 것도(탈출 34,29)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하고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는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를 보려고 가까이 가다가 “모세야, 모세야” 하는 소리를 들었고(탈출 3,4), 야곱도 브에르 세바에서 환시 중에 “야곱아, 야곱아”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창세 46,2) 또 사무엘도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주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세 번이나 듣습니다.(1사무 3,1-10)

이렇게 본다면,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겪은 이 체험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바오로)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하고 코린토 신자들에게 쓸 수 있었습니다.(1코린 15,8)



생각해봅시다

구약의 야곱, 모세, 사무엘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한 대답과 사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한 대답은 아주 다릅니다. 야곱, 모세, 사무엘은 모두 “예, 여기 있습니다” 또는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자기를 부르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사울은 “주님,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사울은 빛 속에서 자기에게 말을 건네시는 분이 신적인 존재라는 것은 의식했겠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받은 충격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에 눈이 멀어 볼 수 없게 된 것이 어쩌면 사울에게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은 육체적인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내면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 철저한 회심의 길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흘 동안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는 사도행전 저자의 표현은 사울이 겪은 회심의 길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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