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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진단] 소용없어 보이는 것들의 소용(정석, 예로니모,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시사진단] 소용없어 보이는 것들의 소용(정석, 예로니모,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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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발행 [1523호]



“바람이 불면 잎이 떨어진다. 잎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과일이 익는다. 차근차근, 천천히.”

영화 ‘인생 후르츠’에 반복되어 나오는 메시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일본 국민배우 키키 키린(樹木希林)의 저음 나레이션이 귀에 붙는다. “고츠고츠, 윳쿠리” 일본어의 정확한 뜻을 몰라도 자꾸 들으니 느낌이 온다. 고츠고츠는 “차근차근”일까, “따박따박”일까, 아니면 “한발 한발”일까.

2017년 후지하라 켄시 감독이 만든 ‘인생 후르츠’는 2018년 겨울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츠바타 슈이치 90세, 츠바타 히데코 87세, 둘이 합쳐 177세. 나고야 동쪽 아이치현 고조지 뉴타운의 단독주택 필지에 40년 전 작은 집을 짓고, 남은 땅에 숲과 밭을 일구며 65년을 살아온 노부부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과일 50종에, 채소 70종을 키우며 살갑게 사는 두 사람의 천천히 익어가는 인생 이야기다.

슈이치 할아버지는 건축가로서 또 도시설계가로서 고조지 뉴타운의 초기 계획을 직접 세웠다. 그러나 그의 뜻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어지는 도시를 보고 건축가의 길을 접는다. 대신 슈이치 할아버지는 자신의 손으로 뭐든 키우고 만들며 느릿느릿한 삶을 산다. 또 이런 남편 곁에는 함께 슬로 라이프를 살며 뭐든 못하는 것 없이 만들어내는 히데코 할머니가 있다.

90분 동안 이어지는 여러 장면 가운데 오래 남는 장면이 있다. 낙엽을 모아 포대에 담는 모습이다. 슈이치 할아버지가 가장 많이 반복했던 일이고, 세상을 뜨던 그날 밭에서의 마지막 노동도 낙엽 모으기였다. 남편을 떠나보낸 뒤 할머니가 이어받아 했던 일도 낙엽 모으는 일이었고.

소용없어 보이는 낙엽을 왜 이리 정성껏 모을까. 밭에 뿌리기 위해서다. 잎이 떨어져 썩어야 땅이 비옥해지니 말이다. 농사의 핵심은 땅이다. 땅이 오래오래 생명을 키워내려면 비옥해야 하고, 비옥하려면 낙엽이 필요하다. 마당에 작은 텃밭을 일구다 페트병 화분을 만들어 상추를 심었던 적이 있다. 첫해 무성히 자라던 상추가 이듬해엔 도무지 자라지 않은 걸 보고 깨달았다. 터가 작고 땅이 비옥하지 않으면 생명을 키워낼 수 없다는 것을. 낙엽은 소용없어진 게 아니다. 실은 가장 소용 있는 것일지 모른다. 할머니의 얘길 들어보자.

“다음 세대에게 돈을 물려줄 수는 없지만, 좋은 흙을 만들어주면 누구든 작물을 만들 수 있잖아요. 무언가를 만들어낼 장소를 전해주는 것은 중요해요. 손녀 세대에게도 좋은 흙을 물려줘야죠. 그이는 낙엽을 남기고 갔어요. 나는 다시 덮어주면 돼요.”

어디 낙엽뿐이랴. 소용없어 보이는 많은 것들이 실은 소용 있는 것들이다. 둘째 아이가 다섯 살 무렵 발달장애라는 걸 알았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하느님을 원망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덜 가져 보이던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더 많이 가진 게 있다는 걸 뒤늦게 알고, 하느님이 내게 시련이 아닌 아주 특별한 선물을 주셨음에 감사드렸다. 소용없어 보이는 것의 소용을 발견하고 다시 살려내는 것, 그것이 이 시대의 화두인 ‘재생’이고 ‘되살림’이다. 맑은 눈으로 발견해보자. 소용없어 보이는 것들의 소용을. 보았거든 부디 다시 살려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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