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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죽음과 끊임없이 그리워하는 하느님의 품

어머니의 죽음과 끊임없이 그리워하는 하느님의 품

[토머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3. 머튼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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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7 발행 [1522호]
▲ 그림=하삼두 스테파노



필자는 지난 호에서 머튼의 생애는 ‘미숙한 머튼’과 ‘성숙한 머튼’의 두 시기로 구분되지만, 그 사이의 과도기적인 시기, 마치 ‘큰 물고기 배 속에 있던 요나와 같은 시기’를 간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체로 1950년대 초ㆍ중반부터 머튼의 내면에 서서히 갈등이 오기 시작하고, 1950년대 중ㆍ후반에는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 1958년 그 유명한 ‘루이빌 영적 체험’으로 머튼의 의식은 결정적으로 변형되고 새로운 내적 자아를 얻게 된다. 그래서 이 체험 전의 머튼은 전통적이고 틀에 박힌 가톨릭 트라피스트 수도승의 모습이었다면, 이때부터는 좀 더 보편적이고 개방적이며 통합된 영성의 수도승 모습을 지니게 된다.

머튼이 쓴 수많은 저서도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 1950년대 중후반, 1960년대의 저술로 나누어 살펴보면, 그에게 얼마나 많은 내적 외적 변화가 일어났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미숙한 머튼의 시기 (1915~1950년대)


미숙한 머튼의 시기라고 해서 그가 어리석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는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으며 영문학을 전공하여 글쓰기에 탁월한 소질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화가인 부모의 영향으로 상당한 수준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트라피스트 수도승으로서 엄격히 규율을 지키며 기도와 노동에 정진했다.

여기서 미숙하다는 것은 1960년대의 성숙하고 통합된 신앙과 의식을 지닌 머튼에 비해, 이 시기는 다소 보수적이고, 자신이 가톨릭 수도승이라는 것에 대해 우월적이고 영웅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인 당시 수도승 대부분이 지니고 있었던 성향이었다.

이 시기는 다시 ①수도원 입회 전 단계 ②초기 수도생활(수도원 입회 후에서 1940년대)의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이 시기를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는 지속되는 ‘쓰러짐과 일어남’ 혹은 ‘어둠과 빛’의 여정을 발견할 수 있다.



수도생활 이전 기간: 1915년~1941년

무신론자였고 방탕한 학창시절을 보냈던 머튼이 어떻게 엄률 시토회인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수도승이 될 수 있었을까? 그의 회개와 관상생활에 대한 성소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필자는 다음의 세 가지 요인이 머튼의 가톨릭 세례와 트라피스트 수도 성소에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①가정적 배경과 심리적인 요인들 ②그가 만났던 좋은 사람들과 읽었던 책들의 영향 ③신비적인 체험들.



머튼의 가정: 어머니의 죽음

토마스 머튼은 1915년 1월 31일 프랑스 프라데에서 뉴질랜드 출신 화가인 아버지 오웬 머튼(Owen Merton)과 미국 오하이 주 출신 화가인 어머니 루쓰 젠킨스(Ruth Jenkins)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프랑스에서 미술 공부를 하며 만났다. 영국 성공회 신자였던 아버지의 원의로 성공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의례였을 뿐, 아버지는 거의 종교 활동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퀘이커 신자였는데, 가끔 모임에 참석할 정도였기 때문에 머튼은 유년 시절에 제대로 된 신앙교육을 받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머튼 가족은 1915년 8월에 외조부모-그의 외할아버지는 자수성가하여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머튼의 젊은 시절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가 있는 미국 롱아일랜드 더글라스턴으로 이주했다. 3년 후, 1918년 11월, 새로 이주한 뉴욕 플러싱의 낡은 집에서 동생 요한 바오로가 태어났다.

그러나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평범한 가정생활을 꾸려가고자 하던 오웬 머튼의 가정에 큰 시련이 닥쳤다. 1921년 10월 3일, 머튼이 여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 루쓰가 그만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의 자서전 「칠층산」에 그때 당시 어머니의 죽음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좌절과 슬픔을 가져다주었는지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슬픔과 좌절의 엄청난 무게가 저를 짓눌렀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슬픔이 아니라 성인의 무거운 당혹감과 침울한 비탄이었으며, 어떤 면에서 자연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더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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