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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은 수녀의 살다보면] (72)상처 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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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7 발행 [1522호]
▲ CNS 자료사진



엄마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E, 그는 엄마가 싫었다고 한다. “엄마가 어린 나에게 일을 혹독하게 시켰거든요. 그 추운 겨울에 개울가에서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게 했다니까요. 엄마가 새엄마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래서 엄마가 싫었고 집에 들어가는 것도 끔찍할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나이가 들면서 그것이 다 상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반드시 엄마에게 이야기하리라. 엄마 때문에 어릴 적 내가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러웠는지를.” 그리고 그는 엄마와 마주앉아 속마음을 털어놓을 그 역사적인 순간을 기다리면서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쓰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고향 선배와 엄마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런데 선배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E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말을 꺼내더라는 것이다. “얘 어릴 적에 어머니가 일을 많이 시켰지요. 기억나시나요? 어떻게 그 어린아이에게 어른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했어요?” 선배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E의 엄마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하더란다. “그래? 내가 그랬어? 정말? 그럼 내가 나쁜 엄마였네. 나쁜 엄마야!” 하는데 E는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누군가 “그럼 엄마가 다 용서된 거요?”라고 묻자 그는 “그럼 어쩌겠어요. 자기가 나쁜 엄마라고 인정하는데. 그것으로 엄마와 나의 아픈 과거는 청산된 거지요. 뭐” 하면서 손을 위로 높이 쳐들더니 “이제 끝~”이라고 외치며 밝게 웃어 보였다.

E는 엄마와 단 한 번의 공감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아파하며 품었던 상처를 떠나보낼 수 있었다. 어쩌면 E는 엄마를 좋아했지만 어릴 적 화해하지 못한 상처로 인해 엄마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너무 힘겨워 더 큰 상처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정작 엄마 자신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는데 말이다.

우리는 무언가에 상처받고 또 상처를 준다. 그런데 상처를 준 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는데 받은 사람만 아파하는 경우가 있다. 왜 그럴까? 나는 아픈데 왜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나도 그렇다. 누군가 나에게 모진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팠다. 그리고 몇 날 며칠을 그 말을 떠올리며 그를 미워했다. 그러다가 그 사람과 우연히 맞닥뜨렸다. 나의 몸은 자동으로 경직되었고 그를 애써 외면하려 했다. 그런데 그는 해맑은 표정으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이게 뭐지?’ 싶어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손까지 흔들어대며 지나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는 늘 그랬던 거 같다. 한바탕 얼굴을 붉히며 논쟁을 벌이고 나서도 언제 그랬냐 싶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더 싫었고 이런저런 생각과 느낌으로 그를 판단하며 멀리하려 했다. 그렇다면 원인은 딱 두 가지. 그가 공감 능력이나 죄책감이 결여되었거나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편견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또 드는 생각, ‘그가 설사 성격장애인이라 하더라도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나만 아파하면 억울하지 않나?’

결국, 상처는 놓아주지 못한 나에게 원인이 있는 거 아닐까 싶다. 원래 상처란 것이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상처를 놓아 보내는 것도 나일 것이다. 처음부터 상처를 준 그의 행동과 언어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었을지도. 그저 거리를 가다 돌부리에 넘어져 아파했을 뿐이다. 그래, 돌부리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넘어진 것은 나 아닌가?



성찰하기

1. 상처를 만나요. 성체 앞에서 혹은 조용한 나만의 공간에서 내 마음속에 가둬둔 무거운 돌덩어리의 실체를 부드럽게 바라봐요.

2. 상처에 친절하게 말해줘요. “그저 지나가다 걸려 넘어진 작은 돌부리를 마음속에 가둬두고 아파하는구나. 고통 덩어리를 붙들어 놓고 매달리며 집착하고 있구나.”

3. 마음속 돌덩어리를 원래 있던 그 자리로(과거) 돌려보내는 상상을 해요. 그리고 나는 원래 ‘지금 여기’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요. 주님께서는 어제도 내일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 계시니까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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