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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신앙체험수기] 우수상/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제6회 신앙체험수기] 우수상/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김은경 (안젤라, 수원교구 초월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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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발행 [1520호]



지금도 이따금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만약 내가 태어나기 전 하느님께서 미리 “그래, 너는 어떤 고난을 선택할래?” 물으셨다면 나는 과연 지금의 고통을 택할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중학교 3학년 때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한없이 자유로운 시기. 머지않아 고등학생이 된다는 설렘과 곧 중학교를 마친다는 아쉬움이 교차하던 시절이다. 뜻밖의 시련을 만나게 된다.

자꾸만 청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오른쪽만 나빠지는가 싶더니 이내 왼쪽에도 문제가 생겼음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찾아가는 병원마다 원인을 모르겠다며 난감해 한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 가게 된 병원에서야 서울에 있는 큰 대학병원을 찾아가라는 진단이 내려진다. 서둘러야 한다는 의사선생님의 마지막 말이 아프게 머릿속에 내리꽂히는 것만 같다.

서울이라면 한 번도 가 본 기억이 없다. 그야말로 낯설기만 한 도시다. 물어물어 보건소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그때 소개받은 병원이 바로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이다.

빨리 서울로 가라고 하신 선생님의 예상대로 결과는 좋지가 않다. 정확한 병명은 ‘신경섬유종증 2형’. 몸에서 다발성으로 양성 종양이 자라는 병. 선천적인 희귀 난치성 유전 질환이다. 유전의 가능성이 50%고 나머지 반은 돌연변이로 태어나는 경우란다. 자라나는 혹을 제거하는 수술이 현대 의학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법이며 완치는 불가능했다. 평생을 그림자처럼 함께 가야만 하는 병. 내가 그렇게 잔인한 병에 걸렸다는 거였다.

모르고 있던 사이 병은 이미 한참이나 진행이 된 상태였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청력이 떨어지는 원인 또한 병에 의한 뇌종양 때문이었다. 이제 망설임조차 나에게는 사치였다. 다급하게 수술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현실적으로 눈앞에 닥친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어마어마한 병원비를 감당할 방법이 없는 거였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두 살 때 이혼하셨다고 한다. 그것이 모두의 행복을 위한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면 두 분의 결정에 대해 불만은 없다. 다만 문제는 엄마와 살게 된 내 인생에 너무 일찍 뿌리를 내린 가난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준비물을 챙기지 못하기 일쑤였다. 계절이 오고 갈 때마다 내 옷장은 동네의 헌 옷 수거함이 됐다. 유난히 체구가 작았기에 또래들이 입던 옷은 대부분 내가 물려 입었다. 성한 옷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단추가 떨어진 옷들, 고무줄이 늘어나고 낡은 옷들이 대부분이었다. 바느질해서 고쳐 입으면 감쪽같다며 엄마는 좋아하셨지만 내가 보기에는 하나도 감쪽같지 않았다. 헌 옷은 아무리 깨끗하게 빨아도 그냥 헌 옷일 뿐이었다. 새 옷 한 벌 편히 사 입지 못하는 현실이 어린 나에게는 더없이 창피하기만 했다.

그런 형편에 뇌종양 수술비를 마련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결국, 병원 사회사업팀의 도움을 받아 수술은 가능해졌지만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왜 불행이라는 녀석은 늘 한꺼번에 찾아와 혼란을 일으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뇌수술을 앞두고 검사를 하던 중 목에서 또 다른 종양이 발견된 것이다. 게다가 이미 수술 시기를 놓쳤다고, 크기가 너무 커서 손을 댈 수가 없단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지독한 악몽이라고 생각하며 엄마 품에 안겨 한참을 울고 또 울었던 기억이 난다.

세상이 온통 노랗게 보일 정도로 어지러운 와중에 누군가 다가 와 내 어깨를 두드린다. “왜 울고 있느냐”고 물으신다. “병원에 왔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의사선생님이 아프지 않도록 치료해 주실 거라고”도 하신다. 고개를 들어보니 오다가다 병동에서 본 기억이 있는 수녀님이었다. 가만히 나를 먼저 다독여 주신 수녀님은 “최선을 다해 주실 선생님을 믿어야 한다”며 이번에는 엄마를 따뜻하게 안아주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주 한가운데에 홀로 덩그러니 떨어진 것만 같이 한없이 막막하고 두렵기만 하던 마음이 다소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그렇게 병원 원목실과 수녀님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다음 날도 수녀님은 밝은 얼굴로 병실로 찾아오셨다. 같이 열심히 기도해 보자고, 작게 십자성호를 긋고는 내 손을 잡으신다. 사실 나는 무교였다. 종교라는 건 살아가는 데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믿는 거로 생각했다. 당장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걱정인 사람들에게 그런 건 배부른 투정일 뿐이라고. 그런 내가 그날은 수녀님께 먼저 부탁을 했던 것 같다.

“수녀님, 성당에 가보고 싶어요.”

뇌수술이 잠깐 미뤄지고 목을 감싸고 있던 두경부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이 먼저 진행된다. 수술 성공의 가능성은 50%. 나머지 반은 당연히 실패의 가능성이었다. 누구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싸움이다. 이제 모든 것은 하늘에 달려 있었다. 다섯 시간의 사투 끝에 종양은 무사히 제거됐지만, 성대 마비로 인해 나는 목소리를 잃게 된다. 겨우 열여섯의 나이에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큰 상흔이었다.

열흘간 중환자실 생활을 마치고 일반실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2층 로비였다. 내 키만 한 성모님이 한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계신 곳.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이는데 울컥 무엇인지 정체 모를 뜨거운 감정이 솟구쳐 올라온다. 그래서 한참을 더 그곳에 서 있어야만 했다.

목의 상처가 아물고 이어진 뇌종양 수술은 무려 열 시간이 넘는 마라톤 수술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어디에나 아쉬움은 남는 모양이었다. 너무도 기다려 온 중학교 졸업식은 물론, 고등학교 입학식에도 참석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졸업식 당일에는 유난히 새하얀 함박눈이 소복소복 많이도 쌓였다. 수술 후 방사선 치료까지 모든 게 끝나고 정확히 100일째가 되던 날 퇴원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앞서서 한 일은 바로 휴대폰을 사는 것이었다. 전화 통화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보니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휴대폰은 나에게 필수여야 했다. 어쩌면 이제 세상과 나를 연결해 주는 유일한 장치인 셈이었다. 혹시 발생할지 모를 응급 상황을 대비하는 차원에서도 휴대폰은 반드시 필요했다.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메시지 보내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신다. 마치 초등학교 1학년 교실의 아이들처럼 엄마의 눈이 반짝이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물론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뭐가 이리 복잡하냐”며 엄마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셨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되풀이하며 차근차근 알려드리자 조금씩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런 엄마가 갑자기 휴대폰을 들고 나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으신다. 그러더니 이내 혼자서 메시지를 보내 보겠다며 자신감을 가득 내보이셨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이 지나고도 엄마에게서는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길게 보내시려는 거지?’ 생각하는 순간이다. 휴대폰에만 집중하던 엄마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신다.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걸려 있다. 동시에 내 휴대폰이 강한 진동으로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려 준다. 얼른 열어 보는데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엄마가 보내신 메시지는 바로 ‘딸사랑해’였던 것이다.

겨우 그 네 글자를 보내기 위해 엄마는 한참이나 휴대폰과 씨름을 하신 거였다. 보낸 사람이 엄마라는 건 알고 있으니 굳이 ‘딸’이라는 글자는 쓰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이나 알려드렸다. 하지만 엄마는 그 후에도 메시지를 보내실 때 ‘딸’이라는 단어를 빼놓지 않으셨다. ‘딸어디야’, ‘딸밥먹었어’, ‘딸언제와’ 등등. 엄마의 메시지에는 물음표도, 띄어쓰기도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거기에는 소리 없는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사랑하는 딸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가득 담겨 었으니까.

학교에 다니면서도 방학 때마다 수술과 방사선 치료는 이어지게 된다. 흉추종양, 척추종양, 척수종양 등등 쉼 없이 자라는 혹은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살기 위해,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는 자연스럽게 교리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나도 정말 신자가 될 수 있을까?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내가? 자격은 있는 걸까?’ 혼란의 시간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겁이 났다. 용서해달라고 하기에는 욕심 많고 이기적으로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교리를 시작하던 날 수녀님은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의 방식을 알고 싶고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실천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는 속도는 바람 같았다. 스무 살이 되는 동시에 어엿한 가톨릭 신자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세례명은 안젤라였다.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성당으로 향했다. 미사가 끝나고는 청년회 활동도 이어갔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건 또다시 3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느 날 엄마가 먼저 “성당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마음을 꺼내 보이신 것이다. 병원에 다니는 동안 “함께 성당에 가자”고 해도 완강하게 거절하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먼저 성당에 다니고 싶다고 하시니 기쁜 마음 한편에서는 혹시 잠깐의 호기심인 건 아닐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는 정말 교리 공부를 시작하셨다. 마지막에는 개근상까지 받으실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하셨다. 성당에 가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상이 되었을 즈음에는 고운 한복을 입고 세례도 받으셨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시는 엄마가 진심으로 자랑스러웠다.
 

유독 힘들고 아팠던 척수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을 때였다. 전신 마비의 위험성 때문에 수술 불가 판정이 내려졌던 수술.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상태에 몸도 지쳐 버린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계속되는 통증에 몸부림치다가 설핏 잠이 들었는데 아주 특이한 꿈을 꾸었다. 장소는 처음 보는 낡은 천막 안이었다. 엄마가 보이는데 울고 계셨다. 옆에 누군가가 있음에도 엄마는 아이처럼 울음을 쉽게 그치지 못하신다. 대체 왜 울고 계시는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가가던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만다. 엄마 곁에 있던 존재는 다름 아닌 성모님이셨기 때문이다. 성모님이 꿈속에 나오신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나와 달리 엄마와 성모님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죄송하다”고 엄마는 거듭 성모님께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신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고 있는데 엄마가 어렵게 말을 꺼내신다. “사실은, 의심했던 적이 있었어요.” 의심이라고? 그제야 그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도 같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이어진 성모님의 반응이다. 잠시 엄마를 빤히 바라보시다가 천천히 엄마의 손을 잡고는 말씀하신다. “기도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 그리고는 다시 울기 시작하는 엄마를 따뜻하게 안아 주신다.
 

거대한 자석이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언가 엄청난 힘에 의해 천막을 나오는 동시에 잠에서 깨었다. 꿈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모든 감각이 너무도 생생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엄마가 바로 옆에서 묵주기도를 하고 계셨다. 꿈에 대해 말씀드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때로는 장황한 이야기보다 묵직한 침묵이 더 정답에 가까울 수도 있는 법이니까. 그날 나를 찾아오신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성모님도 침묵을 원하고 계실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6월의 일이다. 뇌종양으로 인해 두 번째 개두술을 받기 위해 수술대에 올랐다. 중환자실을 거쳐 일반실로 나와서는 종일 엄마가 옆에 계시기 때문인지 회복 속도가 훨씬 빨랐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쓰라리게 가슴 아픈 일을 마주하게 된다.
 

나른한 오후였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몰려 오는 피곤함에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마지막 기억은 분명 그랬다. 그런데 눈을 뜨니 매우 당황스러운 상황이 나를 기다린다. 내 침대가 있는 곳은 병실이 아니었다. 중환자실과 일반실을 이어 주는, 응급한 환자들을 위한 좁은 처치실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생각하는 순간이다. 간호사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더니 허둥지둥 다가 와 내 상태를 살핀다. 동시에 엄마가 연습장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하신다. 청각 장애인인 나와 엄마의 소통 방법이었다. 급하게 할 말이 있으신 듯했다.
 

엄마가 쓰신 글은 한 페이지를 꽉 채울 만큼 길고도 길었다. 그리고 그 글을 거의 다 읽어내려 갔을 즈음이다. 갑자기 엄마가 펑펑 울기 시작하신다. 내막을 알고 보니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잠들었다고 생각한 내가 어느 순간부터 얼굴이 검게 변하더니 숨을 쉬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의사가 달려와 심폐소생술까지 하며 한바탕 소란이 일었단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다. 얼마나 긴박했을지가 가늠되었다. 곁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신 엄마는 정말 많이 놀라신 모양이었다.


연습장에 적힌 글은 이제 수술을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내가 힘들어하는 걸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든다고. 고개를 숙인 엄마의 좁은 어깨가 가늘게 떨려온다.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이 나는 부분은 ‘너무 미안해’와 ‘정말 사랑해’였다. 어찌 해보기도 어려운 찰나의 순간이다. 왈칵 눈물이 터져 나온다. 그동안 내가 엄마를 너무 많이 괴롭혀 왔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햇수로 19년째다. 20번도 넘는 수술이 이어졌다. 겨우 단 몇 걸음의 차이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고비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넘어지고 피 흘려도 다시 일어서면서 끈질기게 버텨왔다. 너무 지쳐서 인제 그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를 선택 하신 이유가 있으실 거라는 믿음으로 참아냈다.
 

내가 들어간 수술실의 문이 굳게 닫힐 때마다, 퉁퉁 부은 채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나를 마주하던 순간마다 얼마나 가슴을 졸이셨을까? 또 뒤돌아서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으셔야만 했을까. 피와 눈물로 얼룩진 숱한 시간이 잔상처럼 뇌리를 스쳐 간다. 이러한 일들을 견디기에는 엄마가 너무 많이 늙어버리셨다는 걸 알았다.
 

“어떡할래? 더 해볼래?” 생각해 보았다. 내가 만약 엄마의 입장이라면? 내 아이의 고통을 그저 곁에서 바라만 보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면 어땠을까? 끔찍했다. 그보다 더 잔인한 형벌은 없을 것 같았다. 올려다본 엄마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자꾸만 가슴으로 사무쳐 온다.
 

‘미안해, 엄마.’ 잠시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쓰라림을 견뎠다. ‘나는 얼마든지 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 피 터지는 전쟁터로 엄마를 데려갈 수는 없어.’
 

화가 났다. 하느님, 왜 좀 더 빨리 저를 깨우지 않으셨나요? 누구보다 엄마의 고통을 이해하고 계실 성모님은 어디서 무얼 하셨나요? 왜 엄마의 고통을 바라만 보셨죠? 서글픔이 밀려왔다. 결국, 우리에게 주신 삶이라는 과제는, 고단함의 연속을 버텨내야 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이 되새겨졌다.
 

오늘도,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6월 뇌수술이 시작되던 때부터는 입으로 음식을 삼킬 수조차 없게 되었다. 오직 배로 연결된 줄을 통해서만 영양식을 섭취할 수가 있다. 모르고 있었다. 좋아하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이었는지를. 이제는 환자 영성체 날 신부님이 오셔도 성체를 영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빠짐없이 오셔서 기도해 주고 가시는 신부님께 더없이 감사할 따름이다. 광야에서 40일을 굶주리신 예수님의 고통을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은 기분이다.
 

불편해진 거동으로 휠체어를 의지하며 살게 된 시간도 어느새 5년이다. 몸은 점점 약해져만 가고 싸움은 점점 힘겨워져만 간다. 모래알처럼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왜 하필이면 나여야만 했느냐고, 원망의 시간도 있었다. 어떻게 이겨내며 살아가야 하는지, 이겨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일인지, 나는 두려웠다. 단지 내가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시린 겨울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반드시 따스한 봄 햇살이 내려앉는다는 거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분명 따사로운 햇살로, 눈부시게 밝은 빛으로, 우리네 삶 구석구석을 비추며 찾아와 주실 것임을 믿는다. 언젠가 예수님이 계신 그곳으로 부르시는 그 날까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사람들과 함께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이유다.



▲ 김은경 안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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