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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특집] 어릴적 덕원 수사들과의 추억, 여든 넘어도 가슴속에 살아 있어

[6ㆍ25 특집] 어릴적 덕원 수사들과의 추억, 여든 넘어도 가슴속에 살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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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발행 [1520호]
▲ “성체 신비를 말씀으로 알아듣고 마지막 순간까지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던 프룀머 신부의 말을 전하는 장초득 수녀.



25일은 6ㆍ25 전쟁이 발발한 지 69돌. 그 상잔의 아픔은 민족도, 교회도 고스란히 겪어야 했다. 그래서 교회는 이날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보낸다.

원산 출신의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장초득(피아, 87) 수녀도 그 참혹했던 수난을 함께했다. 1ㆍ4후퇴 때 월남한 뒤 입회,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의 초대 한국인 원장 수녀로 선출돼 두 차례나 원장을 지낸 장 수녀를 만나 유년 시절과 이산가족으로 살아온 얘기를 들었다.

2012년 여름.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에 잡지 한 권이 배달됐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서 발행하는 계간 「분도」였다. 잡지를 들춰보던 장 수녀는 1장의 사진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시선을 멈췄다. ‘너무도 기뻐’ 한참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원산 해성유치원 시절의 덕원수도원 수사 신부들이 그 사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 왼쪽부터 우달리코 자일러(네 번째), 가브리엘 프룀머(다섯 번째), 요셉 쳉글라인(일곱 번째), 이쇼 샤이빌(열한 번째) 신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얼굴들. 독일 슈바이클베르크수도원에서 온 가브리엘 프룀머 신부,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우달리코 자일러 신부, 뮌스터슈바르작수도원 요셉 쳉글라인 신부, 스위스 우츠낙수도원 이소 샤이빌 신부 등 4명이었다. 사진에 실린 11명의 수도자 중 자신이 아는 네 수도자를 보며 장 수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애써 되살렸다.

젖먹이 때 황해도 봉산에서 원산으로 이주한 장 수녀는 ‘수줍음 많던’ 해성유치원 시절부터 회상했다. “프룀머 신부님은 유치원생이던 저를 자전거에 태워 덕원수도원에 데려가시곤 했어요. 기차도 태워주셨지요. 그때 풍경이 그림처럼 스쳐 가네요. 성모상을 지날 때면 화살기도도 가르쳐 주셨어요. ‘성모님 사랑해요’ ‘성모님, 예수님께도 아가타(장 수녀의 세례명)가 왔다 간다고 전해주세요’ 같은 기도였지요. 신부님은 덕원수도원이 폐쇄될 때 체포돼 자강도 옥사덕수용소에 잡혀가 무진 고생을 하셨는데, 훗날 제가 수녀가 돼 신부님이 계시던 슈바이클베르크수도원에 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버지 같은 분이셨지요.”

자일러 신부는 장 수녀가 해성학교 출신들도 한 해에 한두 명밖에 못 가던 원산의 명문 루시(Lucy) 중ㆍ고교에 입학하자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원산성당에서 미사를 드려주기도 했다. 자신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가타가 수도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썼던 자일러 신부는 신자들에게 병자 영성체를 주러 갔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돼 1948년 12월에 선종했다.

쳉글라인 신부는 가난하고 자녀들이 많은 가정을 물질적으로 많이 보살펴준 따뜻한 사제였다. 당시는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던 때라 장 수녀는 쳉글라인 신부 앞에서 일본어로 교리문답 시간에 12단 기도문을 외고 구두시험도 봤다고 한다. 끝으로 해성학교 시절에 만나 월남 뒤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재회했던 샤이빌 신부는 훗날 스위스 이츠낙수도원에 가서 성묘를 통해 만나야 했다.

원산의 기억은 이뿐만이 아니다. 왜관수도원의 이석진 신부는 원산본당 시절 장 수녀의 해성유치원 동기였다. 어머니(윤옥봉 막달레나)의 친구였던 쿠네군다씨가 바로 이 신부의 어머니였고, 두 어머니는 주일 미사를 마치면 원산수녀원 교리실로 가서 독일에서 온 발부르가 수녀와 임 마리아 수녀에게 성경 이야기를 즐겨 듣던 사이였다. 그 속에서 장 수녀는 성소를 키웠고 해성유치원 교사이던 김 데레사 수녀처럼 ‘수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그런 신앙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장 수녀는 1950년 12월 6일 대형 병원선을 타고 월남, 부산에서 그리던 가족을 만나 서울로 가게 된다. 집안을 돕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 메리놀 수녀원 기숙사에 있으면서 수녀들을 돕던 장 수녀는 1955년 수녀회에 입회, 평생 수도의 길을 걸었다.

“원산에 살 때 덕원의 신부님들은 저희에게 성체거동을 보게 해주셨는데,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 대한 흠숭과 사랑, 성체에 대한 굳센 신심을 심어주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면 그 시절 성체거동은 잊히지 않고 가슴속에 살아 있습니다.”

전쟁 중에 옥사덕수용소로 끌려가 4년 6개월간 고초를 겪다 독일에 귀환, 수도원 피정의 집 책임자로 일하던 프룀머 신부의 말을 장 수녀는 요즘도 잊지 못한다. “아가타, 성체 신비를 말씀으로 알아듣고 마지막 순간까지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말을 기억하며 장 수녀는 요즘도 성체 앞에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꿈을 꾼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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