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3·1절 특집] 교회 선교권 보호 좇다 민족의 아픔 외면하는 과오 범해

[3·1절 특집] 교회 선교권 보호 좇다 민족의 아픔 외면하는 과오 범해

일제 강점기 교회 지도층은 독립운동에 왜 소극적이었나

Home > 기획특집 > 일반기사
2019.03.03 발행 [1504호]
▲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회 지도층은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나라의 주인이 누가 되든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에서 선교권을 보장받고 교회를 유지하려는 입장을 고수했다. 사진은 제6대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1935년 9월 덕원수도원을 방문한 후 기념 촬영을 한 장면으로 수도원 입구에 일장기가 걸려 있는 게 눈길을 끈다.



한국 교회는 최근까지 공식으로 3ㆍ1 운동 기념 미사를 지내지 않았다. 교회가 3ㆍ1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무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100년 전 1919년 3ㆍ1 운동 당시 “외국 선교사들로 이루어진 한국 천주교 지도부는 일제의 강제 병합에 따른 민족의 고통과 아픔에도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은 보호해야 한다는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워 해방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외면한 채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했다. 나중에는 신자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할 것과 신사참배를 권고하기까지 했다.”(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 3ㆍ1 운동 100주년 기념 담화 중에서)

일제 강점기 한국 교회 지도층은 독립운동에 왜 소극적이었을까? 답은 일본이 패망하리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라의 주인이 누가 되든 간에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에서 선교권을 보장받고 교회를 유지하려는 입장뿐이었다.



정교분리 내세워 독립운동 금지시켜

당시 한국 교회 지도층은 프랑스인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이 처음부터 정치불간섭주의를 기반으로 한 일제 지지 노선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1905년 을사늑약 이전까지 러시아와 가깝고 일본을 견제하는 ‘친러배일’(親露排日)의 입장이었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은 “조선의 모든 선교사를 다른 이로 대체해 달라”는 편지를 교황청에 썼고,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3년 7월 27일 레오 13세 교황을 직접 알현해 이 문제를 제기했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박탈되자 상황이 급반전했다. 이토는 1905년 12월 초대 조선통감 취임식 때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를 초대해 “국가가 종교에 간여하지 않을 것이니 종교도 정치에 간여하지 말아 달라”는 정교분리를 제안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선교사 명의로 된 교회 부지의 소유권을 인정해주고 각종 세금의 면세 특권을 허락했다.

‘일제는 정치, 선교사는 종교’라는 역할 분담론에 뮈텔 주교와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그 정부가 어떤 형태이건 선교를 보장하고 교회 존속을 약속하는 한 정치 문제는 관여할 바 아니라는 입장을 정리해 정치불간섭주의 노선을 취하게 됐다. 그러면서 선교사들은 민족 독립운동을 반정부 정치 활동으로 인식해 죄악시하고 금지시킨 것이다.

반민족적 선교 자세

당시 교회 지도층의 반민족적 선교 자세는 안중근(토마스) 의거와 3ㆍ1 운동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안중근 의거를 살인 행위로 단죄하고 파문했던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는 “이 나라 백성들은 독립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한국인 신자들에게 “일본 정부는 합법 정부이므로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주어라”며 “만세 운동에 가담하면 대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만세 운동에 참여한 유스티노신학교 교사와 신학생들을 퇴교시켰다.



신사참배까지 공식 허용

‘내선일체(內鮮一體)ㆍ황민화(皇民化)’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한국 지배 기본 정책이었다. 이를 위해 우리 말과 글, 이름 등을 말살하고 신사(神社)참배를 강요했다. 신사참배는 일본 민족종교인 신도(神道) 의식으로 일본 천황을 인간 모습을 한 신으로 규정하고 일황을 섬겨야 한다는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처음 한국 교회 지도부는 신도를 이단으로, 신사참배를 미신 행위로 규정했다. 「서울대목구 지도서」(1923년)와 「조선 천주교 공동 지도서」(1932년), 그리고 한국 교회 공식 교리서인 「천주교 요리」(1925년)는 신사참배를 하거나 신사에서 행하는 예식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전시 체제가 확대되자 뮈텔 주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계속 거부할 경우 새로운 박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염려해 “신사참배가 비록 그 시작은 종교적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일반의 인정과 관계 당국의 성명에 의해 국가의 한 예식으로 됐다”며 신사참배를 용인했다. 아울러 동양 관습을 존중해 조상 제사와 공자 의례를 허용한 1935년 교황청의 선교 정책과 주일 교황사절 마젤라 대주교의 요청에 따라 한국 신자들의 신사참배를 공식 허용했다.



일제의 전시 동원에 협력

1938년 일제의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당시 교회는 일제의 전시 동원 체제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요구에 따라 동양 평화, 황군 무운장구, 전몰장병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병기 헌납 보조금을 냈다. 또 징병제를 독려하는 강연회도 개최하고, 미사 때 천황에게 절대적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해야만 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 가톨릭평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보기
첨부파일
발행일자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