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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특집]교회 지도층과 달리 ‘선각자 그리스도인’ 독립운동에 참여·주도

[3·1절 특집]교회 지도층과 달리 ‘선각자 그리스도인’ 독립운동에 참여·주도

신자들의 3·1 운동과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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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3 발행 [1504호]
▲ 3ㆍ1 운동 이후 가톨릭 신자들은 간도로 건너가 무장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다. 사진은 가톨릭 신자들의 무장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인 명월구성당 전경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한국 교회 지도층이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할 때 평신도와 일부 한국인 성직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는 더 할 수 없이 소중한 행동이었다.



신자들의 3ㆍ1 운동

우리 민족의 잠재된 항일 정신은 3ㆍ1 운동으로 일시에 거족적 독립운동으로 폭발했다. 교회 지도자들의 반대와 우려에도 일부 신자들은 3ㆍ1 운동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신학생들은 샤르즈뵈프 교장 신부의 만류에도 1919년 3월 5일 저녁 운동장에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9일 대구 약전골목에서 열릴 만세 행렬에 합류하기로 했다. 시위는 가톨릭 학교인 해성학교 교사이며 3ㆍ1 운동 경상북도 조직부장인 김하정(루카)이 주도했고 사회단체와 연락하는 일은 성 유스티노 신학교 교사인 홍순일이 담당했다. 김하정의 동생이던 김구정(이냐시오) 신학생이 신학교 내에서 ‘독립선언서’ 등사를, 서정도 신학생이 태극기 제작을 분담해 준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 신학생의 고발로 학교 당국에 발각돼 시위 합류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 일로 홍 교사는 파면되고 두 신학생은 근신 처분을 받았으면 신학교는 5월 1일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하정과 대구본당 신자인 김찬수가 주도한 대구 만세 운동은 1000여 명이 군중이 참여할 만큼 큰 호응을 받았다.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도 1919년 3월 11일 신학생 주도로 만세 운동이 있었다. 신학생들은 이날 저녁 학교 밖으로 나가 군중 시위에 가담했다. 서울 신학생들은 28일 밤에도 교문 밖으로 뛰어 나가 삼호정 언덕과 새남터 노들 언덕에서 벌어진 횃불 만세 운동에 합류했다.

평신도들도 각지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만세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일제 총독부 자료를 보면 3월 10일 황해도 해주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개신교와 천도교 등 각 종단과 연합해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중국 연변 용정본당 신자들은 13일 낮 12시 삼종 종소리를 신호로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18일에는 강화에서 신자인 김용순과 조기신, 신태윤 등이 주도해 군중 1만여 명을 모아 만세 운동을 벌였다. 또 27일 경기도 고양에선 신자들이 “우리는 조선 독립운동에 관해 이렇게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 면 직원은 태연히 사무를 집행하고 있으니 조선인으로서 부당하다. 속히 사무를 파하고 우리에게 가담하라”는 독려문을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만세 시위에 참가한 구산공소 청년 5~6명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고, 이들 중 남 마태오 회장 아들은 독립선언 벽보를 붙인 혐의로 징역 10개월 형을 받기도 했다. 같은 날 경기도 광주군 망월리에 사는 신자 김교영이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 운동을 주도했고, 29일에는 용인군 내사면 남속리에 사는 신자 한영규와 김운식이 마을 주민 100여 명을 이끌고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며 만세 운동을 벌였다.

4월 3일 수원에서는 신자 이순모가 선두에 서서 군중 2000여 명과 함께 우정면사무소와 화수리 경찰 주재소를 습격, 불을 지르고 일본인 순사를 격살했다. 이 시위로 신자 이순모와 김선문, 안경덕, 김여춘, 김광옥, 최주팔 등이 체포됐다. 또 7일 황해도 신천에서 만세 운동을 하다 체포된 신자 김경두는 “자기 나라를 보존하는 것은 국민의 의무이니 한국인으로서 한국 독립을 희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한국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한국인으로서 당연한 의무이므로 죄가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1919년 3월부터 5월 말까지 각지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후 구금된 천주교 신자는 53명이나 됐다. 이 숫자는 불교도 95명, 유교도 55명과 비교해 볼 때 적은 숫자는 아니다. 학자들은 만세 운동에 참여했으나 체포되지 않았거나 체포된 후 실제로 천주교 신자이지만 교회 처벌이 두려워 그 신분을 밝히지 않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숫자보다 훨씬 많은 신자가 만세 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3ㆍ1 운동 이후 독립운동

평신도들의 무장 독립운동은 간도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됐다. 3ㆍ1운동 이후 간도 지방으로 이주한 천주교 신자들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 독립운동을 펼쳤다. 간도 명월구성당과 대장 방우룡의 집을 군사령부로 쓴 의민단은 무장병력 300명, 군총 400정, 권총 50정 정도로 무장,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했다.

일제는 간도 지역 성당을 한국인 독립운동 근거지로 인식하고 종교 탄압에 주력했다. 이때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살던 금당촌과 동포대, 현성 등이 큰 피해를 봤다. 특히 교우촌 대교동에선 신자들이 학살되고 부녀자들이 폭행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현대 신학자들과 민족사학자들은 일본 강점기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의 민족 활동에 대해 ‘국적 없는 식민주의적 신앙관’과 ‘민족의 고통을 외면한 현실초월주의적 신앙관’을 탈피하고자 했던, ‘암울한 시대의 예언자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들은 그 대표 인물로 안중근(토마스) 의사를 제시했다.

이처럼 3·1 운동에 참여한 신자들의 비율은 개신교, 천도교에 비해 낮지만, 당시 천주교인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했던 외국인 선교사로 구성된 지도층과 달리 민족의식을 잃지 않고 조국을 저버리지 않았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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