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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칼럼] 밤바다를 항해하는 노인과 젊은이

김원철 바오로(보도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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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9 발행 [1493호]



순례자들이 순례 길에서 장거리 여행의 무료함을 달랠 겸 저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씩 꺼낸다. 늙은 장원 청지기는 순서가 되자 다른 사람과 달리 “이 흰머리에는 나이가 쓰여 있고, 이 마음은 흰머리처럼 시들었소” 하며 신세타령부터 한다. “나불거리는 이 혀는 과거의 업적만 이야기할 뿐”이라고 한탄하는가 하면 “인간은 늙어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는 네 가지 불꽃이 있는데…” 하면서 자꾸 딴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그러자 일행 중 하나가 “그런 지혜로운 말이 무슨 소용이 있소. 내내 설교만 할 거요”라고 타박한다.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나오는 이 장면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노인과 젊은 세대 간 단절의 일면을 본다.

이 시대 노인들은 흰머리에 쓰여 있는 나이와 주름살에 새겨진 연륜을 인정받지 못한다. 사회는 수평적 민주주의로 빠르게 진화하는 터라 더는 어른을 필요로 하지 않는 듯하다. 하다못해 작은 공동체에 도덕적, 윤리적 다툼이 생겨도 노인은 옳고 그름을 가려주는 어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표결이나 여론조사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그렇다고 노인이 시대 변화를 예상하고 홀로서기를 준비한 것도 아니다. 궁핍했던 어제를 억척스럽게 살아내 오늘의 물질적 풍요를 일궜지만, 정작 자신들의 내일은 준비하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지 17년 만인 2017년 고령사회(UN 기준 65세 이상 14%)가 됐다. 일본은 그 기간이 24년 걸렸다. 동네 공원에 가보면 준비 없이 맞이한 고령사회의 우울한 현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이런 마당에 과거의 업적을 얘기한들 ‘꼰대’ 소리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시행착오 끝에 체득한 삶의 지혜를 전해주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노인이 비상식적 행동을 했다는 뉴스라도 뜨면 ‘틀딱충’이니 ‘할매미’니 하는 혐오성 댓글이 줄을 잇는다.

젊은 세대라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전근대적 가부장제 사회의 사고방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라고 말한다. 선대가 창출한 풍요는 소수에게 집중된 불평등한 풍요라고 깎아내린다. 또 존경할만한 어른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장원 청지기가 말하려고 했던 네 가지 불꽃, 즉 노인의 탐욕·거짓말·분노·자만을 눈곱만큼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권위 상실과 시대 변화 부적응에 대한 자성을 노인들에게 요구한다.

노인과 젊은 세대의 단절은 가정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다. 노인의 연륜은 인고의 축적물이다. 특히 ‘시간의 지혜’는 소중한 사회적 자산이다. 노인은 그 자산을 전수할 책임이 있고, 젊은이는 그것을 물려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젊은 세대는 너무나도 쉽게 ‘구식’을 단죄한다. 하지만 그 낡은 방식이 바로 어제까지 한 가정과 국가를 떠받친 프레임이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지난 10월 젊은이를 주제로 바티칸에서 열린 주교 시노드에서 젊은이들은 백발 성성한 주교들 말에 귀를 기울였다. 주교들도 젊은이들의 용기 있는 발언을 경청했다. 남태평양 사모아의 한 평신도는 이 광경을 늙은 현자(賢者)와 젊은이가 카누를 타고 가는 모습에 비유했다. “늙은 현자는 별자리를 읽고 바다를 항해하는 법을 알고 있으며, 젊은이는 앞으로 나갈 힘이 있다.”

노인들이 계속 꿈꿀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그래야 아들딸들이 예언자(사도 2,17 참조)로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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