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70여 년 단절에도 북 위기 때는 인도적 지원

70여 년 단절에도 북 위기 때는 인도적 지원

교황청과 북한의 교류는

Home > 교구종합 > 일반기사
2018.10.28 발행 [1487호]
▲ 1988년 3월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에 북한 신자로는 최초로 이진철(왼쪽), 홍도숙씨가 교황청을 방문, 요한 바오로 2세에게서 안수를 받고 있다. 뒤로는 훗날 춘천교구장 주교가 된 장익 신부가 보인다.



교황청과 북한, 북한과 교황청은 ‘미수교국’이다. 두 나라는 상주공관을 두지 않고 있고, 당연히 공식 외교관계도 없다. 그 ‘단절의 관계’는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 후 70여년 동안 이어졌다.

이 같은 상황에서 18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북 의사’를 표명함에 따라 그간 교황청과 북한 간 접촉은 어떻게 이뤄져 왔는지에도 시선이 쏠리고 있다.

교황청과 북한 간 접촉이 처음 시도된 건 1982년 10월이다. 당시 로마에서 공연하던 평양교예단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알현을 희망해 일반 알현이 주선된 것. 하지만 교예단 측이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불참하면서 알현은 무산됐다.

그럼에도 교황청과 북한 간 접촉은 이어졌다. 교황청은 1985년 프랑스 국제 연대 단체인 ‘제3세계 기아 퇴치와 발전을 위한 가톨릭위원회’(CCFD)를 통해 북에 50만 달러를 제공했고, 이에 북측 외교관 김양황이 교황청을 방문, 교황을 알현하고 감사를 전했다. 이것이 교황청과 북한 간 첫 공식 접촉이었다.

이어 1987년 6월 평양에서 열리는 비동맹 특별각료회의에 초청을 받은 바티칸은 장익(훗날 춘천교구장) 신부 등으로 이뤄진 대표단을 옵서버로 파견했고, 장 신부는 북에서 조선기독교도련맹을 통해 5명의 가톨릭 신자를 만났다.

1988년은 교황청과 북한 간 관계사에 ‘특별한’ 한 해로 기록됐다. 그해 3월 30일, 전후 최초로 바티칸을 밟은 북한 신자 이진철(모이세), 홍도숙(데레사)씨가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 중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발 씻김과 안수를 받았다. 같은 해 2월 프랑스 파리에 파견된 북한 외교관의 아들인 30대 유학생 1명이 우르바노대학에 유학, 5개월간 철학 과정을 밟다가 돌아간 일도 있었다. 그해 6월엔 ‘조선천주교인협회’(훗날 조선가톨릭교협회)가 설립됐으며, 9월에는 평양에 장충성당이 지어졌다. 그리고 한 달 뒤 서울대교구 장익 신부와 정의철(현 로마한인신학원장) 신부가 교황청 특사 자격으로 방북, 장충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북에서 종교적 해빙 조짐이 보이자 교황은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에 앞서 방북을 검토하기도 했다.

이후 소강 상태를 보이던 교황청과 북한 간 관계가 재개된 건 1996년이다. 1995년 북한에 큰물(홍수) 피해와 가뭄 등으로 식량난이 발생하자 교황청 국무원 외무차장 클라우디오 마리아 첼리 대주교(현 교황청 사회홍보평의회 의장) 등으로 구성된 바티칸 대표단이 1996년 1월 북한을 방문, 피해 실태를 조사했고, 1997년 7월 또 방북해 인도적 지원 문제를 협의하고 지원했다. 국무원 외무차관 첼레스티노 밀리오레 몬시뇰(현 우즈베키스탄 주재 교황대사)도 1997년 7월, 1998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 인도적 지원 문제를 협의했다.

교황청과 북한 간 관계 개선을 위한 첫 시도는 2002년 5월 이뤄졌다. 하지만 당시 밀리오레 몬시뇰과 루이스 마리아노 몬테마요르 몬시뇰(현 콜롬비아 주재 교황대사) 등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북측과 어떤 문제를 논의했는지는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동안 접촉이 없던 교황청과 북한이 다시 접촉을 재개한 것은 올해 5월 30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남북 태권도 선수단의 합동 시범 공연을 앞두고서였다. 하지만 이 또한 북측의 불참으로 남측 선수단만의 단독 시범 공연으로 펼쳐졌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 가톨릭평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보기
첨부파일
발행일자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