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83) 베드로의 부인 (루카 22,54-62)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83) 베드로의 부인 (루카 22,54-62)

베드로의 부인에도 격려와 위로 담은 주님 눈빛

Home > 사목영성 >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2018.10.14 발행 [1485호]

▲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는 닭이 울고 예수님께서 몸을 돌려 바라보시자 예수님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슬피 운다. 사진은 예루살렘 베드로 회개 성당 전경.


▲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장면을 표현한 예루살렘 베드로 회개 성당 조각.




“그들” 곧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원로들(22,52 참조)은 예수님을 붙잡아 끌고 대사제의 집으로 데려갑니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뒤따라갑니다.(22,54) “멀찍이 떨어져 뒤따라간” 것은 따라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마지막 만찬 때에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22,33) 그리고 요한복음에 따르면, 베드로는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사제의 종을 칼로 내리칠 정도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 책망을 받습니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0-11)
 

베드로가 멀찍이 뒤따라간 것은 어쩌면 예수님의 이 말씀에 기가 한풀 꺾였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을 멀찍이 서나마 뒤따라갔다는 것은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표시가 아닐까요.  

당시 대사제는 카야파였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대사제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은 그들이 예수님을 먼저 한나스에게 끌고 갔다가 카야파에게 보냈다고 전합니다. 한나스는 카야파의 장인으로서 기원후 6년부터 15년까지 대사제직을 수행한 인물이지요.(요한 18,12-27 참조)

대사제의 집 안뜰에서 사람들이 불을 쬐며 앉아 있는 것을 본 베드로는 그들 사이에 끼어 앉습니다. 그런데 어떤 하녀가 베드로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는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이도 저 사람과 함께 있었어요.”(22,55-56) “이이”란 베드로를, “저 사람”이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 여자야,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 하고 부인합니다.(22,57)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또 베드로를 보고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아닐세” 하고 다시 부인하지요.(22,58) 두 번째 부인입니다.

한 시간쯤 지나서 또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이이도 갈릴래아 사람이니까 저 사람과 함께 있었던 게 틀림없소.” 그러자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하고 말합니다.(22,59-60ㄱ) 베드로가 세 번째로 부인하는 장면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베드로가 세 번째로 부인하는 그 순간에 있었던 두 가지 일을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는 “닭이 울었다”는 것입니다.(22,60ㄴ) 닭이 운 것은 루카복음에서만 아니라 네 복음서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 때에 베드로에게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22,34)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한 가지를 더 언급합니다.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22,61)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22,62)고 전하지요.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자 닭이 울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만찬 때에 주님과 함께 죽을 준비도 돼 있다고 장담했던 베드로였습니다만 막상 예수님께서 체포돼 끌려가시자 들키지 않으려 멀리서 뒤따라갑니다. 대사제 관저 안뜰에까지는 들키지 않고 잘 왔습니다. 불을 쬐고 있는데 하녀가 예수님과 한패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엉겁결에 아니라고 부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나서는 안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이 한패였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다시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두 번째로 부인했을 때 베드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어쩌면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적잖게 켕겼을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세 번째로 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두고 예수님과 한패라고 주장하자 베드로는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한패가 아니라고 부인했던 것에 대한 가책이 남아 있어서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부인하는 대신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라고 얼버무린 것일까요?

그러나 베드로의 이런 태도는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취할 수 있는 그런 태도입니다. 베드로가 뒤따라 나선 것은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돼 있다고 장담한 것을 드러내려는 호기(豪氣)일 수도 있고 주님이신 스승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조심스럽게 따라나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위기가 닥치자 호기나 염려는 졸지에 사라져 버리고 자기방어와 변명이 앞섭니다.

그때에 닭이 웁니다. 닭 울음소리에 베드로는 비로소 예수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십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눈을 정면으로 마주칩니다. 비로소 제정신이 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습니다.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신 주님의 눈빛은 어떤 눈빛이었을까요? 스승을 부인하는 제자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눈빛이었을까요? 믿었던 제자에게 버림받았다는 원망의 눈빛이었을까요?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고 말씀하시는 바로 그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임을 잊고 살거나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척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마치 닭 울음처럼, 우리를 일깨우는 소리가 있을 것입니다.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빛과 마주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소리를 못 들은 척하지 맙시다. 주님의 눈빛을 외면하지 맙시다. 주님의 눈빛은 우리를 다그치는 눈빛이 아니라 우리를 격려하고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는 눈빛임을 잊지 맙시다.

 

 

ⓒ 가톨릭평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보기
첨부파일
발행일자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