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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시절 박해로 가톨릭 신자 100만 불과

2018 러시아 월드컵 - 러시아 정교회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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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8 발행 [1472호]
▲ 관광 명소가 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그리스도 부활 성당. 겨울 폭설 하중을 견딜 수 있게 고안된 양파머리형 지붕은 러시아 정교회 성당의 상징이 됐다.



한국이 16강 진출에 실패해 러시아 월드컵 열기는 반감됐지만, 들여다보면 축구보다 더 흥미진진한 게 러시아 종교다. 러시아는 정치ㆍ사회ㆍ문화 어느 영역이든 한 꺼풀만 벗기면 정교(正敎, Orthodox)가 나타나는 동방 정교회의 나라다.

전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게르하르트 뮐러 추기경이 “가톨릭과 정교회는 97% 일치가 이뤄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정교, 특히 러시아 정교는 아직 낯설기만 한 형제다. 오죽하면 2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과 러시아 정교회 수장 키릴 총대주교가 만났을 때 ‘1000년 만의 상봉’이란 수식어가 달렸을까.



▶언제 복음을 받아들였나

러시아는 10세기쯤 현재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예프를 중심으로 번성했다. 그때만 해도 ‘루시’ 혹은 ‘키예프 루시’라고 불렸다.

러시아 최초 연대기인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공후(公侯)는 987년 종교를 전해주려는 주변국 사절단을 맞아들였다. 처음 도착한 이슬람 사절단이 “이슬람을 믿으면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하자 공후는 “우리는 술 마시는 기쁨 없이는 살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가톨릭과 유다교에서도 선교사를 보냈다.

하지만 공후는 동방 정교에 마음이 쏠렸다. 시찰단이 콘스탄티노플(동로마, 현 터키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장엄한 예식을 보고 돌아와 “천국과 지상의 경계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격찬했다. 그러자 공후가 먼저 세례를 받고 정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이콘, 러시아 정교의 꽃

비잔티움의 상징적 형상에 슬라브족 특유의 전통을 더한 이콘은 러시아 정교 신앙의 꽃이다. 러시아 성당들은 이콘의 갤러리다. 회중석과 지성소를 구분하는 ‘이코노스타스’(이콘의 벽이라는 뜻)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사도들과 성인들의 일대기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비잔틴 이콘이 모자이크 형식으로 발전한 것과 달리 러시아에서는 목판화 이콘이 주를 이룬다. 키예프 루시는 목조(木造) 문화권이기 때문에 숲에서 재료를 구했다. 성당 건축도 마찬가지다.

이콘은 수도원에서 주로 제작됐다. 우리 눈에 익은 ‘삼위일체’를 그린 안드레이 루블료프(1360?∼1430)만 하더라도 한평생 수도원에 파묻혀 이콘을 제작한 수사였다. 이콘 앞에서 기도한 뒤 국가적 위기에서 벗어나거나, 질병이 치유된 이야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블라디미르의 성모’가 대표적이다. 러시아인들은 모성에 대한 강렬한 애정 때문인지 ‘동정’ 마리아보다 ‘어머니’ 마리아를 더 친숙하게 여긴다. 양파머리형 성당 지붕(쿠폴, kupol)도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겨울 폭설에 무너지지 않는 지붕을 궁리하다 착안한 창의적 디자인이다.



▶수난과 박해

17세기 대분열이 가장 큰 사건이다. 다른 종교 분쟁들처럼 지나친 신앙심이 화근이었다. 당시 수장이었던 니콘 총대주교는 교회가 곧 국가가 되는 세상을 꿈꾸며 대대적인 전례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자 니콘 못지않게 열성적인 사제 아바쿰(Avvakum)을 주축으로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옛 의식을 고수하며 들고 일어났다.

개혁안 중에 반대파를 극심하게 자극한 것은 십자성호를 그을 때 두 손가락이 아니라 세 손가락을 사용하는 것과 두 번 합송하던 알렐루야를 세 번 부르라는 것처럼 지극히 사소한 조항이었다. 서로 사탄이라고 단죄하며 다투는 동안 아바쿰을 비롯해 2만 명 가까운 구교도들이 화형의 불길 속으로 자진해 걸어 들어갔다. 황제는 그 혼돈을 틈타 교회와 양분하던 권력을 독점했다. 구교파는 1905년 황제가 관용령을 발표하기 전까지 박해를 받았다.

볼셰비키(1917) 혁명 이후 또 한 번 고난의 길을 걸었다. 종교는 사회주의 건설의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수많은 성직자가 살해됐다. 심지어 양조장으로 용도가 변경된 성당 건물도 있었다. 현재 교회 위상과 권위는 상당 부분 회복한 상태다.



▶러시아 정교와 가톨릭

접촉이 거의 없었다. 가톨릭은 정교회의 견제와 거부 때문에 뿌리를 내리기 어려웠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신자들은 소비에트 시절에 더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가톨릭 대교구는 2개, 교구는 3개다. 신자 수는 약 100만 명.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출신 신자들이 많다.

글ㆍ사진=김원철 기자 wckim@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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