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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 작품 봉헌한 다음 날 주님 품에 안기다

백영수 화백 스테인드글라스 대표작 2점 의정부교구 호원동성당 유리화로 탄생 생전 이중섭 화가와 신사실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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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8 발행 [1472호]
▲ 백영수 화백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성모자(왼쪽)’, ‘성 프란치스코(가운데)’





젊은 시절부터 그림과 글로 신앙을 고백했던 화가 고 백영수(프란치스코, 1922~2018) 화백의 대표작 두 점이 성당 스테인드글라스로 재탄생했다.

의정부교구 호원동본당(주임 김남철 신부)은 6월 28일 교구장 이기헌 주교 주례로 백 화백의 작품 ‘성모자’와 ‘성 프란치스코’ 스테인드글라스 축복식을 거행했다.

‘성모자’는 백 화백의 1988년 작 ‘창가의 모자’(60×73㎝)를, ‘성 프란치스코’는 1985년 작 ‘새들’(54×65㎝)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제작한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은 유리화 공방 유리제(대표 조규석)가 제작했으며, 지난 5월 8일 설치했다. ‘성모자’는 제대 십자고상 기준 오른쪽에, ‘성 프란치스코’는 왼쪽에 각각 설치됐다.

이 주교는 축복식에서 “백 화백은 30대 시절인 1950년대 쓴 시에서 ‘내 가슴에 성당이 서 있다’(‘봄비1’, 1958년)고 고백했다”며 “이러한 마음을 간직하고 사셨기에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드셨으며, 하느님께서 축복을 해주시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감사를 표했다.

주임 김남철 신부는 “102세 원로화가 김병기 화백이 ‘백영수의 그림은 그 자체가 평온, 차분함’이라고 한 말씀이 생각난다”며 “보고 있으면 평온을 가져오는 좋은 작품들이 우리 성당에 걸리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백 화백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자상은 생명의 원천인 어머니 즉 성모님을 연상케 한다”면서 “백 화백의 그림은 생명과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신앙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국내보다 유럽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한 백 화백은 1922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 두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1944년 귀국해 목포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다 1946년 천경자ㆍ윤재우 화백과 함께 조선대학교에 국내 최초의 미술과를 설립했다. 1947년 김환기 화백이 주축이 돼 결성한 신사실파 동인 6명 가운데 막내 화가로 참여했다. 신사실파 동인은 순수 조형이념을 표방한 추상계열 작가들의 모임이다. 백 화백은 이들 가운데 이중섭(1916~1956)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1950~1960년대 한국출판미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다 1977년 파리로 건너가 그곳에서 34년간 활동했다.

백 화백이 호원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가 프랑스로 떠나기 전인 1973년 호원동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다. 당시 호원동 집에는 화가와 문인들이 매일 같이 찾아왔다. 2011년 귀국한 뒤 옛집을 재건축해 주거 공간을 겸한 ‘백영수미술관’을 세웠다. 백영수미술관은 호원동성당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으며, 1층 전시실에 백 화백의 작품을 전시 중이다.

한편, 호원동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축복식에 휠체어를 탄 채 참석했던 백 화백은 축복식 다음 날인 6월 29일 선종, 하느님 품에 안겼다. 장례 미사는 2일 호원동성당에서 봉헌됐으며, 유해는 의정부 신곡2동성당 봉안당(하늘의 문)에 안치됐다.

문의 : 031-873-4613, 백영수미술관



글·사진=이힘 기자 lensman@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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