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영성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9) 17세기 ② - 얀센주의
인간 자유의지 비판하며 구원 예정설 강조
2018. 06. 17발행 [14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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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은 인문주의자들은 인간 구원 문제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종교개혁주의자들은 인간의 어떠한 도움도 없이 하느님 은총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게다가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부터 일어날 일들을 정해 놓으시면서 은총으로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선택하셨고 죄 때문에 심판받을 사람을 내버려두셨다는 이중예정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가톨릭교회에 영향을 끼치면서 영성생활에 큰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 코르넬리우스 얀센.



은총론에 대해 오류를 범한 교의적 얀센주의와 얀센

네덜란드 아쿠오이(Acquoy)의 겸손한 가톨릭 가정 출신이었던 코르넬리우스 얀센(Cornelius Jansen, 1585~1638)은 1602년 루뱅(Louvain)대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념 논쟁에 휘말려 고통을 당했습니다. 후기 스콜라신학을 주장하는 예수회원들과 벨기에 신학자 미쉘 드 베(Michel De Bay, 1513~1589) 추종자들 사이의 논쟁이었습니다. 바이아니즘(Baianism)은 16세기 스콜라신학을 반대하며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 이단적인 요소를 첨가했던 이단 사상이었습니다. 결국 얀센은 스콜라신학보다 바이아니즘으로 기울었습니다. 학위 취득 후 얀센은 주로 파리에 머물면서 초대 교회 교부들 사상을 공부하면서 교회개혁 의지를 세웠습니다.

1616년 루뱅으로 돌아온 얀센은 예수회원들과 자주 논쟁하며 경쟁했는데, 이러한 충돌을 이유로 종교개혁주의에 가깝게 다가가기보다는 오히려 가톨릭 신자들이 성경을 신비적이고 신심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을 연구했습니다. 1630년 루뱅대학교 교수로 임명된 얀센은 이러한 주제를 가르쳤습니다. 1636년 얀센은 이프르(Ypres)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2년 뒤에 갑자기 병사했습니다. 하지만 얀센은 루뱅에서 지내는 동안 내내 준비했으나, 결국 사망 후 1640년에야 출판된 저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때문에 논란의 중심에 놓여 이단으로 단죄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에 매료되었던 얀센은 저서에서 펠라기우스주의와 원죄 및 신적 은총을 중요 주제로 다루면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한 몰리나주의(Molinism)와 인문주의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얀센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과 은총론을 과장해서 연구함으로써 하느님 은총을 미리 받아 선택된 사람이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얀센의 주장은 칼뱅의 예정설을 가톨릭 신학과 신심에 무리하게 적용하면서 교의(敎義)적 얀센주의(Jansenism)를 탄생시켰습니다.

얀센주의는 첫째로 의인들에게 하느님의 어떤 계명을 실행할 은총이 없고, 둘째로 타락한 본성 상태에서 내적 은총에 저항할 수 없으며, 셋째로 그 상태에서 강요된 자유만으로 인간 공로를 얻을 수 있고, 넷째로 신앙을 위해 선행하는 내적 은총의 필요성을 거부하며, 다섯째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신 것을 거부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게다가 얀센주의자들은 성사생활마저도 참여하는 행위가 있다는 이유로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해 오는 은총 작용을 거부했습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PP. VIII, 재임 1623~1644)는 1643년 교황 칙서 「교회 추기경들에게(In Eminenti Ecclesiae)」에서 얀센의 저서를 금서에 올린다고 공표했으며,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Innocentius PP. X, 재임 1644~1655)는 1653년 교황 헌장 「좋은 기회에」에서 은총과 관련해 얀센이 언급한 다섯 가지 오류를 이단으로 단죄하며 얀센의 저서에 포함된 모든 견해를 승인하지 않겠다고 선고했습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교의적 얀센주의를 제거했다고 생각했으나, 교회 안에 얀센주의와 관련된 새로운 상황이 나타났습니다.


▲ 장 뒤베르지에 드 오란.





예정설을 접목한 윤리적 얀센주의와 뒤베르지에


프랑스 남서부 바욘(Bayonne)의 귀족 가문 출신인 장 뒤베르지에 드 오란(Jean Duvergier de Hauranne, 1581~1643)은 루뱅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에 얀센과 친분을 맺었습니다. 1604년 파리에서 다시 얀센을 만난 뒤베르지에는 여러 해 동안 얀센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1611~1614년 뒤베르지에는 얀센과 함께 고향을 돌아가서 은둔 생활을 하며 고대 교부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연구했습니다. 1620년 뒤베르지에는 프랑스 중부 생 미쉘 앙 브렌느(Saint-Michel-en-Brenne)에 생 시랑(Saint-Cyran) 수도원 원장이 돼 여생을 그곳에서 지냈습니다. 따라서 뒤베르지에는 이후에 생 시랑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때 뒤베르지에는 콩드랑(Charles de Condren, 1588~1641)을 알게 되었으며, 그를 통해 베륄(Pierre de Brulle, 1575~1629)과도 친교를 맺었습니다.

뒤베르지에는 얀센이 그의 저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준비하는 중에 그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시토회 포르 루아얄 데 샹(Port-Royal-des-Champs) 수녀원 영성 지도 겸 고해 사제를 역임했습니다. 1633~1636년에 뒤베르지에의 지도 아래에 있었던 수도원들은 자연스럽게 얀센주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뒤베르지에는 당시 프랑스 수상이었던 아르망 장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Armand Jean du Plessis de Richelieu, 1585~1642) 추기경과 갈등을 겪게 되었고, 리슐리외 추기경에 의해 뱅센(Vincennes)에 투옥되었습니다. 1642년 석방된 뒤베르지에는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얀센주의를 이단으로 단죄했다는 소식을 1년 내내 접하면서 살다가 1643년 사망했습니다.

뒤베르지에는 윤리적 얀센주의를 새롭게 주장했습니다. 하느님 은총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 고신극기와 고행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정설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엄격한 고행의 삶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한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뒤늦게라도 은총을 베풀어주시어 구원될 수도 있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해법을 제시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윤리적 얀센주의는 1653년 교의적 얀센주의가 최종적으로 단죄될 때에 함께 단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부터 있었던 은총 논쟁을 다시 한 번 재현하면서 시작되었던 교의적 얀센주의는 프랑스에서 윤리적으로 엄격하게 생활하는 모습을 첨가시키면서 윤리적 얀센주의를 탄생시킴으로써 수덕생활과 관련된 오류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수덕생활은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서 늘 실천되던 모습이었기 때문에 얀센주의가 단죄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교회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따라서 이후 영성가들은 그리스도인 영성생활 안에 들어 있는 얀센주의의 흔적을 지우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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