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영성
[예수회 회원들의 생애와 영성] 칼 라너 (4)
교회 일치 위해 노력하고 학문 활동의 꽃 피워
2018. 02. 11발행 [14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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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라너. 그는 로렌츠 예거 추기경과 함께 1946년 교회일치위원회를 결성한다. 라너는 1848년부터 1960년까지 위원으로 활동했다.

▲ 로렌츠 예거 추기경.



전쟁

인스브루크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칼 라너와 그의 예수회 동료들은 새로운 시련에 봉착한다.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되고 새로운 교육법이 제정됨에 따라 인스브루크 신학대학이 해체됐기 때문이다. 교수들은 무기한 정직을 당했다. 이에 비오 11세 교황은 새로운 신학과를 설립했다. 그 신학과는 교황청이 인가한 국제 신학원인 카니시아눔에 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9년 카니시아눔마저 국유화되어 예수회원들은 티롤(Tirol) 지방에서 추방됐다.

이때 칼 라너는 비엔나로 가게 된다. 비엔나교구장 인니처(Innitzer) 추기경의 배려로 라너는 사목활동과 영신수련을 지도할 수 있었고 사제 양성과 사제 평생교육에 힘을 쏟았다. 여기서 그는 전례신학자 안드레아스 융만(Andreas Jungann, 1889~1975)을 만나게 된다. 또 라너는 다수의 강연 여행을 하게 된다. 이 강연 여행을 통해 그는 그리스도교의 인간관 및 신학의 출발점으로서 인간학을 강연했으며 하이데거의 철학을 소개하기도 했다.



교회 일치

칼 라너는 1939년부터 1944년까지 비엔나에 머물면서 교회 일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과 국가사회주의가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를 가깝게 했다. 칼 라너와 접촉한 개신교 신학자들은 베르노이헤너(Berneuchener Kreis) 회원들로 전례 쇄신을 추구하던 인물들이다. 그 창설자는 개신교 신학자 빌헬름 슈텔린으로서 그는 파더본(Paderborn)의 로렌츠 예거(Lorenz Jger) 추기경과 함께 1946년 교회일치위원회를 결성했다. 칼 라너는 이 위원회에서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위원으로 활동했다.

칼 라너의 교회 일치를 위한 활동에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라이부르그의 콘라드 그뢰버(Conrad Grber, 1872~1948) 대주교는 1943년 1월 21쪽의 서한을 통해 17개의 불안한 요인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신학과 전례 쇄신에 관한 모든 차원을 비판하면서 다음 사항을 언급했다. 철학적 오류, 신앙의 오류, 전례적 오류,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오류, 성체성사에 대한 오류, 모든 신앙인의 사제직에 대한 잘못된 이해 그리고 교회 일치에 대한 오류 등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칼 라너는 ‘가톨릭 독일 지역의 철학적 신학적 시대 질문(Theologische und philosophische Zeitfragen im katholischen deutschen Raum)’이라는 글을 통해 안드레아스 융만이 강조한 보편 사제직을 옹호했다. 그뢰버가 우려하는 바와 같이 사제직은 단지 민주화의 관점에서 이해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라너는 동의한다. 즉 사제에게만 유보된 직분을 모든 이들이 다 수행할 수 있어서 심지어 미사까지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다. 신자들의 사제직이란 사제를 포함한 모든 신자의 공동체가 함께 미사를 거행한다는 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공동체는 다양한 조직을 포함하기에 기도와 안수로 축성된 사제도 이 공동체의 일원인 것이다. 또, 미사에 참여하는 공동체 신앙인들은 사제의 직분 수행에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 전체가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공동체가 기도와 성가 그리고 전례적인 동참을 통해 미사를 거행하기에 공동체는 공동의 전례 거행자이자 공동의 사제인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공동체는 보편적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라너의 이러한 이해에 대해서 비오 12세 교황도 같은 해에 응답했다. 교황은 그뢰버 추기경에게 전쟁의 혼란함과 나치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목전에 두고 철학과 신학 그리고 전례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냐고 질타했다. 그러면서도 교황은 라너의 전례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학자로서의 새로운 시작

1944년 여름부터 1945년 8월까지 칼 라너는 독일의 니더바이어른(Niederbayern)에서 사목했다. 전선이 가까이 형성돼 그는 비엔나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뮌헨 근교의 풀라흐에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신학 강의를 하고 그해 8월 인스브루크 대학으로 돌아와 다시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1949년부터 정교수로 취임해 1964년까지 교의신학 및 교의사(Dogmatik und Dogmengeschichte) 교수로서 활동했다. 이 기간의 학술 활동으로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됐다.

그는 새벽 5시에 미사를 봉헌한 후 연구와 강의를 했다. 창조론, 원죄론, 은총론, 고해성사론, 성품성사론, 병자성사론을 라틴어로 강의했다. 학술 활동 이외에 사목도 병행했다. 주일 미사, 고해성사, 영신수련 지도, 본당 공동체 지도 등이었다.

그의 탁월한 학문 활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는 괴레스회(Gprres Gesellschaft) 와 바오로회(Paulus Gesellschaft) 등을 통해 자연과학과 신학과의 대화, 마르크스주의와 신학과의 관계를 연구하고 발표했다. 또, 그는 다양한 신학종합사전과 여러 총서를 펴냈다. 「신학과 교회를 위한 사전(Lexikon fr Theologie und Kirche)」, 「세상의 성사(Sacramentum Mundi)」, 「신학 소사전(Kleine Theologische Wrterbuch)」, 「신학 논총(Schriften zur Theologie)」, 「논의 제기(Quaestiones Disputatae)」, 「사목신학 편람(Handbuch der Pastoraltheologie)」, 「구원의 신비(Mysterium Salutis)」, 「공의회(Concilium)」, 「공의회 소문헌(Kleines Konzilskompendium)」 등이다.


이규성 신부(서강대 신학대학원 교수,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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