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지독한 고통’도 ‘은총과 감사’로 바꾼 주님의 부르심
어머니 기도의 힘으로 전신마비 딛고 사제품 받은 조남준 신부
2018. 01. 07발행 [14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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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남준 신부가 “고통도 은총”이라며 “감사하며 사랑하자”는 말로 신자들에게 새해 인사를 하고 있다.



“쾅.” 고막을 찢는듯한 충돌음이 들렸다. 몸은 차창 밖으로 튕겨져나가 허공을 날고 있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피곤해 악몽을 꾸는구나 하며 눈을 뜨는 순간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심지어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2017년 12월 18일 사제품을 받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조남준 신부는 전신마비 환자였다. 방송 촬영감독이었던 그는 2007년 6월 17일 새벽 촬영을 마치고 이동하던 중에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과속으로 달려오던 뒤차가 그가 탄 차를 그대로 들이받은 것이었다. 조수석에서 자고 있던 그는 튕겨져나가 아스팔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해병대 출신으로 20대의 건장한 몸이었지만 그 충격으로 목이 부러졌다. 응급실로 실려간 그에게 내려진 진단은 ‘경추 5, 6번 골절로 인한 전신마비’였다.

하지만 그는 6개월 만에 기적처럼 일어났다. 그간 뼈를 깎는 재활 치료를 했다지만 그는 무엇보다 “어머니 기도의 힘”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이후 두 차례 성지순례를 하면서 하느님 부르심을 확신하고 수도원에 입회해 사제가 됐다.

사제 수품 후 첫 부임지인 프랑스 르망 선교를 앞두고 어학 공부 등 준비가 한창인 조 신부를 서울 성북동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본원에서 만났다. 그의 몸은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왼쪽이 여전히 불편하다고 했다. 그의 목에는 여전히 핀이 박혀 있다.



▲죽음보다 더한 절망을 경험한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주치의에게 전신마비가 됐다는 걸 들었을 때 죽고 싶었다. 그런데 죽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이라도 움직여야 손목을 긋기라도 할 텐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왜 하필 나일까’ 하며 원망을 많이 했다. 중환자실을 거쳐 일반 병실로 옮겼을 때 어머니가 집에 있던 십자고상을 가져왔다. 그걸 보고 정말 엄청난 욕을 해댔다. 십자고상을 치우라고. 더 이상 하느님, 예수님은 없다고 온갖 짜증과 욕설을 퍼부었다.”


▲ 교통사고 전 촬영감독으로 활동하던 건장한 모습의 조 신부.



조 신부는 휴대폰에 저장된 교통사고 전 모습을 보여줬다. 방송연예과를 전공한 그는 대학 졸업 후 촬영감독으로 취직해 몇몇 감독들에게 인정받으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또래보다 벌이가 좋아 씀씀이가 컸고 멋도 부리고 사치도 했다.



▲대학과 직장 시절 끼도 많았겠다.

“호기로웠다. 그래서 해병대를 자원했다. 친구들과 회식을 해도 늘 앞서 계산하며 허세를 부렸다. 비싼 옷만 입고 다녔다. 사제가 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빠가 되는 게 꿈이었다.”



전신마비 환자가 가장 힘들어하는 건 욕창이다. 욕창이 생기면 살이 괴사해 치료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조 신부는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로 6개월간의 병상 생활에도 단 한 번도 욕창이 생기지 않았다고 했다.



▲전신마비 아들을 돌보는 어머니의 고통이 컸겠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온종일 저를 간호하셨다. 다 큰 아들이 누워서 보는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예쁘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너를 다시 키우는 거다. 29살까지는 잘 자라주었고 이제는 너를 다시 키우는 거야’ 하며 위로해주셨다.”

▲ 조남준 신부가 대착복 후 부모님과 입회 추천 신부와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아버지 조창만(바오로)씨, 어머니 박길남(스텔라)씨, 조 신부, 안상일 신부.





조 신부는 수도원에 입회해 신학교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록」을 읽다 통곡하며 어머니의 사랑을 또다시 깨달았다. “어디든지 계시는 하느님은 나의 어머니가 있는 자리에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내가 있는 거기에선 나를 가엾이 여겨 마음이야 아직 신을 모독하는 병에 걸려 있을망정 육신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다”라는 성인의 고백이 그의 처지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원망하던 하느님께 어떻게 다시 기도할 수 있었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어차피 일어난 일 되돌릴 수 없으니 네가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보도록 하자’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후 조금씩 변화가 왔다. 내 처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세상에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저분들에 비하면 나는 머리를 다치지 않아 부모를 알아볼 수 있어 감사하고 죽지 않아 고마운 거다. 그날 이후 저게 감사할 일이 넘쳐났다.”



감사하는 마음을 먹자 몸에 변화가 생겼다. 그는 “하느님께서 새 마음을 넣어주고 새 기운을 불어넣어 돌처럼 굳은 몸을 살처럼 부드럽게 해줬다”고 했다.

“수술 후 한 달 보름 만에 오른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족 모두가 손뼉을 치며 울었다. 신문지를 드는 것으로 재활 치료를 시작했다. 6개월간 재활에 매달렸다. 그렇게 운동 능력의 80%를 회복했고 걸어서 퇴원할 수 있었다. 당시 원목으로 있던 홍상표 신부가 “너 같은 환자는 본 적이 없다”며 “하느님께서 네가 지금까지의 삶과 다른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 같다”고 했다.”



조 신부는 퇴원 후 성치 않은 몸으로 이스라엘과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800㎞ 길을 순례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어떤 길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성지순례를 그것도 도보 순례를 한다는 게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지만 나 자신을 깊이 있게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넘어져 다치기도 하면서 하느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스라엘 순례를 하면서 가족의 소중함과 신앙생활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고 인간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됐다. 귀국 후 본당 신부를 찾아가 사제가 되고 싶다고 했다.”



조 신부는 2009년 2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 입회했다. 열살 넘게 어린 신학교 동기들과 함께 공부하고 4급 장애의 불편한 몸으로 수도생활을 이어가 종신서원을 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 조남준 신부가 12월 18일 서울 새남터 순교성지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형제들과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하느님께서 왜 사제로 부르셨다고 생각하나

“하느님 안에서 자유롭게 살게 해주시려고 부르신 것 같다.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수도생활은 제게 기쁨 그 자체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개인적인 어려움은 하느님의 은총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목 뒤에 수술 흉터가 크게 있어 그걸 자꾸 감추려 했다. 한 형제가 하느님의 힘을 받은 증거인데 왜 감추려 하느냐며 숨기지 말라 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내 뒤통수를 또 한 번 때리셨다. 이후부터 내 약함을 모두 인정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그래서 종신서원 성구도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로 정했다.”



조 신부는 자신을 비워내신 예수님의 삶을 사제로서 따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감사’가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4월께 떠난다는 프랑스 선교도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통도 은총”이라며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자”며 환하게 웃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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