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영성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53) 13세기 ① - 새로운 이단 운동의 출현
이단이 쓸려간 자리에 싹튼 ‘금욕과 청빈 정신’
2017. 12. 10발행 [14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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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개혁 운동이 성직(聖職)의 잘못된 관행을 척결하고 성직자 생활 개선에 큰 영향을 끼쳤음에도, 여전히 교회 당국에 실망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나름의 방법을 찾아 교회에 충실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엄격한 영성 생활을 추구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서면서 중세에 새로운 이단 운동을 불러왔습니다.



이원론을 바탕으로 육신을 부정하고 순수한 영혼이라고 주장한 카타리파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이미 12세기 중엽에 ‘카타리파(Cathari)’로 불린 이단 운동이 비잔틴 제국에서 전래되어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습니다. 십자군 원정대와 함께했던 상인들은 아르메니아와 비잔틴 제국에 있었던 이단 운동인 ‘바오로파(Paulicianism)’와 발칸 반도를 거치면서 ‘보고밀파(Bogomil)’의 사상을 네덜란드까지 전했습니다. 이러한 이단 운동들은 다시 혼합돼 특히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바오로파는 양자론(養子論)과 영지주의 및 반(半)마니교 사상을 주장했으며, 보고밀파는 신영지주의 혹은 종교와 정치 두 가지 모두에 관련된 이원론을 주장했습니다. 특히 그들이 금욕주의적인 모습을 지녔기 때문에, 카타리파는 자신들을 윤리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순결하다고 주장하면서 순수함을 뜻하는 그리스말 ‘카타로이(Katharoi)’에서 유래한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카타리파는 세상이 선과 악의 두 원리에 근거해서 존재한다는 이원론을 펼쳤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선이 지배하는 영적인 세계를 추구해야지 악이 지배하는 물질 세계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물질 세계를 악으로 규정한 카타리파는 인간 육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거부했습니다. 즉, 결혼 생활 및 육식 생활을 죄악시했을 뿐 아니라, 성사 생활마저 거부했습니다. 한편 카타리파는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 가난한 삶 속에서 엄격하게 금욕 생활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카타리파가 엄격한 생활을 실천하자 그 당시 교회의 모습에 실망을 느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카타리파를 지지하고 추종했습니다. 그들의 이단적인 위험성을 깨달은 교회 당국은 설득과 무력 사용 및 이단 심문 등의 방법을 모두 동원했지만, 카타리파 세력을 쉽게 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카타리파는 13세기 말 소멸됐지만, 교회에 복음적인 가난을 묵상하라는 과제를 남겼습니다.



육신을 부정해 정통 교리와 충돌했으나 금욕 생활로 공감을 얻은 알비파


알비파(Albigenses)는 12~13세기 특히 프랑스 남부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던 카타리파 추종자들 일컫는 이름입니다. 이 명칭은 랑그독(Languedoc)에 위치한 알비(Albi)에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기에 도시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알비파의 존재가 세상에 공식적으로 언급된 것은 1145년부터였습니다. 특히 1167년 툴루즈(Toulouse) 인근 생 펠릭스 로라게(Saint-Flix-Lauragais)에서 카타리파 성직자들이 모여 공의회를 개최해 카타리파 교계 제도를 갖추고 자체 교리 체계를 확립하면서 대중들에게 알비파로 더욱 알려졌습니다.

프랑스 남부에서 알비파가 널리 알려지자 추종하는 사람들도 급속히 확산됐지만, 알비파의 교리가 이단이라는 사실도 바로 파악됐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에 대한 책을 이미 저술한 바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가톨릭 신학자들은 선과 악의 대립을 다루는 이원론은 정통 교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알비파 추종자들은 덩달아 마니교도로 낙인 찍혔습니다.

알비파의 교리가 문제인 것은 인간 육신을 악이 지배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한 데 있습니다. 따라서 알비파는 하느님의 외아들 그리스도가 부정한 육신을 취하실 수 없다면서 그리스도 육화 교리를 거부했습니다. 심지어 알비파는 부부 생활을 통한 자녀 출산을 사악한 행위라고 매도함으로써, 정통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알비파가 성직자들의 생활 개선과 철저한 금욕 생활을 강조할 때에는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PP. III, 재임 1198~1216)는 교황에 즉위하면서 알비와 툴루즈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알비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처음에는 교황 사절을 파견해서 그들이 평화롭게 개종할 수 있도록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툴루즈의 백작 레몽 6세(Raymond VI de Toulouse, 1156~1222)는 교황 사절 카스텔노의 피에르(Pierre de Castelnau, ?~1208)의 임무를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1208년 대리인을 시켜 교황 사절을 살해했습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레몽 6세를 파문하고 알비파 척결을 위한 ‘알비 십자군’을 파견하도록 지시함으로써, 1209~1255년 사이에 알비 십자군 원정이 있었습니다.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알비파와 카타리파의 오류를 반대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또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PP. IX, 재임 1227~1241)는 1233년 스페인과 프랑스에 창궐하는 이단들을 심문하기 위한 종교 재판을 설치했습니다. 결국 서방 교회는 알비파를 척결했습니다.



가난을 강조하는 방법에서 교도권과 마찰을 빚은 발데스파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이단 운동이 출현했습니다. 리옹(Lyon) 출신 페트루스 발데스(Petrus Valdes)가 1173년경 복음서에서 청빈 정신을 발견하고 가난을 실천하며 가난에 대한 설교를 하자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습니다. 1179년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교황 알렉산더 3세(Alexander PP. III, 재임 1159~1181)는 발데스의 청빈 서약을 승인했으나 설교를 금지시켰습니다. 하지만 발데스와 추종자들이 교황의 결정에 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1184년 교황 루키우스 3세(Lucius PP. III, 재임 1181~1185)는 베로나(Verona) 교회 회의에서 ‘발데스파(Waldeness)’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파문했습니다. 발데스파는 성직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설교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설교할 자격을 갖춘다고 생각했습니다.

1207년 랑그독에서 발데스파 일부 사람들이 모임을 갖고 오스카의 두란두스(Durandus de Osca)와 동료들은 가톨릭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그들의 청빈 정신을 높이 사서 그들을 ‘가난한 가톨릭들(Pauperes Catholici)’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던 발데스파는 종교 체계를 확립하고 고유한 신앙 고백을 하면서 개신교의 한 분파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12세기부터 시작된 이단 운동에서 이원론에 바탕을 두고 육신을 부정하는 교리 부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금욕과 청빈을 실천하는 생활 부분에서 공감했습니다. 결국 가톨릭 교회는 이런 현상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했고, ‘탁발 수도회’의 출현을 맞이했습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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