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출판
등돌린 형제 감싼 교회 일치의 선구자
예수회 첫 사제 파브르 성인 삶과 신앙 국내 첫 출간
2017. 11. 12발행 [14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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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 파브르 성인

▲ 베드로 파브르 성인 초상. 출처=가톨릭굿뉴스



베드로 파브르 성인

메리 퍼셀 지음 / 김치헌ㆍ김학준 신부 옮김 / 가톨릭출판사 / 1만 8000원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도좌에 오른 2013년. 그 이듬해 교황이 시성한 한 성인이 있다. 통상적 시성 절차와 달리 기적 심사가 없는 특별 규정에 따른 시성이었다. 베드로 파브르(Peter Faber, 1506~1546) 성인이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파브르 성인은 예수회 첫 사제로,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목적 동반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파브르 성인의 활동은 16세기 초 종교개혁으로 가톨릭 교회가 위협받던 때 빛을 발휘했다. 종교적ㆍ정치적으로 대혼란을 겪던 당시 그는 유럽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을 신앙으로 감화시켰다. 특히 설교와 진심 어린 고해성사로 수많은 이들을 회심으로 이끈 ‘하느님의 숨은 조력자’였다. 1872년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시복된 뒤 140여 년이 지나고 나서 시성 된 파브르 성인의 발자취를 담은 전기가 국내에서 처음 출간됐다.

파브르 성인은 1506년 프랑스 남동부 알프스 산맥 인근 작은 마을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았던 마을은 전통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깊이 간직해 온 곳이었다. 성인은 어릴 때부터 사제에게 들은 강론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설교했다고 알려질 정도로 영민했다.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집을 떠나 파리 바르브대학에서 수학한 성인은 1525년 이곳에서 예수회를 창설한 이냐시오 성인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만난다. 이때 이냐시오 성인에게 영신수련을 받은 파브르 성인은 자신의 단점과 나약함을 하느님께 오롯이 봉헌한 뒤 28살이던 1534년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유럽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95개 논제를 내건 이후 각국에서 종교 재판와 종교 박해가 빈번했던 혼돈의 시기였다. 었다. 가톨릭 교회를 지지했던 국왕은 루터와 칼뱅파의 이단자들을 색출해 죽였고, 이단자들은 성상을 파괴하고 자신들만의 교리를 이어갔다. 모두가 배척과 죽음을 외칠 때 파브르 성인은 이단자들에 대한 사랑과 따스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정신은 그의 편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루터파를 이방인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네.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그들을 사랑으로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그는 20세기 이후 교회가 외치는 ‘일치의 정신’을 400년 앞서 실천했다. 파브르 성인에게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각지에서 몰려든 것 또한 그가 지닌 깊은 인간애 덕분이었다. 그는 수도원 사제들에게 “고해를 들을 때는 온화하고 부드러워야 하며, 비록 고해자가 무례하더라도 결코 날카롭게 이야기하거나 혐오감을 드러내지 말라”며 성사에 임하는 것 자체를 하느님께서 훌륭하게 여기심을 깨닫도록 권고했다.

스페인, 포르투갈에 예수회를 처음 알렸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교황 신학 자문을 역임하기도 한 파브르 성인은 선종할 때까지도 말과 이성보다는 오로지 ‘땀과 피’로 행하는 실천으로 포용력을 지닐 것을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인을 두고 “단순한 믿음, 순수함, 언제든 즉시 발휘할 준비가 된 내면의 식별력을 지녔으며, 매우 온화하고 사랑 가득한 분”이라고 칭송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인 올해 파브르 성인의 위대한 업적에서 빛나는 하느님 은총을 돌아볼 때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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