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영성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 (3)
주님의 충실한 두 종, 예수 성심께 봉헌
2017. 11. 12발행 [14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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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롱비에르 성인은 설교와 피정 지도를 통해 영혼을 구하는 일에 매진했다. 사진은 콜롱비에르 성인이 설교하고 있는 모자이크화.



마르가르타 마리아 알라코크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는 ‘환시’를 보곤 하였는데 실제로 예수님의 계시였음에도 여러 덕망 있는 수도자들이 보기엔 그것은 악마의 활동을 통한 것으로 여겨졌다. 출신과 교양 면에서 동료들에 비해 떨어졌던 그녀가 받았을 오해와 심지어 멸시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한편, 예수 성심께서는 1673년 처음 성녀에게 나타난 이후 변함없이 그에게 확신을 주셨다. 어느 날엔 성녀가 주님께 탄원하는 중에 나타나셔서 ‘당신의 충직한 종이자 완벽한 친구’를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당신의 충직한 종이자 완벽한 친구’인 콜롱비에르 성인이 제3수련 중이던 때였다.)

두 성인의 첫 만남은 콜롱비에르 신부가 최종서원을 하고 원장직을 맡은 바로 그달 말에 이뤄졌다. 콜롱비에르 신부가 수녀원에 훈화를 위해 초대받았던 때였는데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는 내적 목소리를 통해 그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콜롱비에르 신부 또한 수녀에게 내재된 ‘은총 가득한 영혼’을 보았다. 그 후 콜롱비에르 신부가 사순절 고해성사를 위해 수녀원을 방문했을 때 둘의 대화는 한 시간 반 정도 이어졌고, 콜롱비에르 신부는 주저함 없이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가 본 환시의 진실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 판별의 기준은 (1)(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열망 (2)순명에 대한 빗나가지 않는 사랑 (3)(주님을 위해) 모욕당하려는 원의 등이다. 이러한 태도들은 악한 영이 아니라 좋은 영에게서만 오기 때문이다. 이 기준은 주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이냐시오 성인이 「영신수련」에서 ‘영의 식별’을 기술한 것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후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알라코크 수녀의 회고를 통해 우리는 예수 성심의 계시가 다시 특별한 방식으로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하루는 콜롱비에르 신부님이 우리 성당에 미사성제를 거행하러 오셨는데 우리 주님께서 엄청난 은총을 그분과 제게 선사하셨습니다. 영성체 시간에 제가 주님을 모시러 다가갔을 때 주님께서는 활활 타오르는 가마와 같은 당신 성심과 다른 두 개의 심장을 제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심장들은 주님 심장 안에서 하나가 되고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나의 순수한 사랑은 이 세 심장을 영원히 하나로 만들 것이다.’”

이 계시 이후 알라코크 수녀는 자신이 그동안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던 계시의 내용을 콜롱비에르 신부에게 알렸고, 콜롱비에르 신부는 그것을 글로 쓰도록 했다. 계시의 핵심은 사람들이 예수 성심의 사랑을 알게 하고 그 좋은 점을 널리 알리라는 초대다. 이 사명은 두 성인의 공동 사명이 됐다. 콜롱비에르 신부와 알라코크 수녀는 더이상 지도자와 피지도자의 관계가 아니라 주님 안의 동등한 형제, 자매로서 각자 다른 장소에서 ‘함께’ 일하게 된다.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요청하신 것은 (1)당신 성심을 기리기 위하여 특별하고 공적인 축일을 제정하는 것 (2)죄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영성체 (3)미사성제에 대한 죄를 용서받기 위한 보속 행위 (4)세상에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을 전파하는 것 등이다.

1675년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팔부축제 중 6월 21일은 최초의 ‘예수 성심 축일’로 기억될 수 있다. 마침 예수회 성인 루이지 곤자가의 축일이기도 한 이날에 콜롱비에르 신부와 알라코크 수녀는 함께 자신들을 예수 성심께 봉헌했다.



런던에서

콜롱비에르 신부는 파레르모니알에서 공동체 원장과 수녀원 영적 지도자로 지냈지만,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두 사명을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열여덟 달이 지나고 또다시 예측할 수 없는 섭리로 런던에 파견된다. 요크의 공작 제임스와 결혼한 마리아 베아트리체(Maria Beatrice)를 위해 ‘설교 사제’로 가는 것이었다. 제임스 공작은 가톨릭 신자였고 형인 개신교 신자 찰스 2세가 죽을 경우 영국 왕위를 계승하게 돼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 당시 영국은 정치적 이유로 가톨릭을 박해하고 있었는데, 제임스의 아내가 된 마리아 베아트리체는 영국으로 가는 조건으로 사제가 동행하기를 요구했다. 이러한 미묘한 상황에서 처음엔 프랑스 예수회의 드 생 제르맹 신부가 지목됐지만, 드 생 제르맹 신부는 배신자의 밀고로 영국에서 추방된다. 이에 그를 대신할 인물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고해 사제였던 드 라 셰즈 신부가 콜롱비에르 신부를 추천했다. 1676년 10월 13일 콜롱비에르 신부는 과거 파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국 런던의 화려함 속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박해 속에 고통받는 신자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는 세속적인 사교계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설교와 피정 지도 등을 통해 파견 목적인 영혼을 구하는 일에 매진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찰스 2세 국왕의 궁정에서 ‘성인’으로 불릴 만큼 신뢰를 받고 있던 그였지만, 배신자 타이터스 오우츠(Titus Oates)의 덫을 피할 수 없었다. 가톨릭 인사들이 영국 국왕을 암살하려 한다는 소위 ‘교황주의자 역모 사건’(1678)은 타이터스 오우츠의 거짓 고소로 시작됐고 영국 내 수많은 가톨릭 인사들이 고초를 겪게 된다. 타이터스 오우츠는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고, 결정적으로 예수회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신앙을 속여서 입회했다가 못된 처신으로 퇴회당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음모의 주요 배후로 예수회를 지목했고, 예수회원 541명을 고발했다. 이 가운데 콜롱비에르 신부도 포함돼 있었다. 이에 콜롱비에르 신부는 체포돼 악명 높은 감옥 킹스 벤치(King’s Bench)에 감금됐다. 그곳은 ‘지옥의 예견’이라 불릴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고, 원래 약했던 성인의 건강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악화됐다. 결국, 다섯 주 후 1678년 12월 29일 그는 프랑스로 추방됐다.



▲ 김민철 신부(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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