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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사목자를 찾아서] (4) 서공석 신부(부산교구)

[원로사목자를 찾아서] (4) 서공석 신부(부산교구)

“그리스도인, 성체성사의 삶으로 온전히 자신을 내어줘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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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9 발행 [1437호]
▲ 신학을 공부한 이후 평생을 그리스도 신앙 언어를 연구하고 가르쳐온 서공석 신부가 모든 사제들에게 권위를 내려놓고 섬기는 성체성사의 삶을 살자고 당부하고 있다.



부산교구 원로사목자들이 거주하는 부산 금정구 선목사제관에도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늘은 청명했고 단풍은 하나둘씩 물들고 있었다. 사제관 현관문 앞에서 기자를 반긴 서공석(요한 세례자, 83) 신부는 소탈했다. 부산대신학교 도서관에 책을 다 넘겨 주고 왔다고는 하지만 그의 책장과 책상 위에는 원서들이 적잖이 쌓여 있었다.



평생 교회 권위 내려놓는 데 앞장

서공석 신부는 교회 안팎에서 존경받고 있는 신학자다. 그는 사제가 된 이후 평생을 교회 권위를 내려놓는 데 앞장섰다. ‘탈권위’에 관한 그의 신학적 입장은 때때로 도전적이었다. 교계제도와 교회 쇄신, 여성 사제직, 고해성사, 토착화 문제 등을 교회 가르침대로 전하지 않는다고 1990년대 말 교황청 신앙교리성으로부터 경고를 받기까지 했다.

“왜 그러셨어요?” 하고 에두르지 않고 물었다. 서 신부는 남의 일인 양 무심하게 말했다. “신앙교리성에서는 내가 분도출판사를 통해 1999년 출간한 「새로워져야 합니다」의 내용 중 일부가 교회 가르침과 어긋나니 수정하라는 편지를 보내왔어요. 그래서 제가 답장을 했어요. 교회에 순명하고 또 고치겠다. 책 내용 어느 부분이 교회 가르침과 어긋나는지 지적해 주고 어떻게 고쳐야 할지 알려 주면 그대로 하겠다고 썼지요. 그런데 아직까지 신앙교리성에서 답이 없네요.”

그는 말을 이었다. “신학을 공부한 이후 한평생 ‘신앙 언어’를 연구하고 가르쳐 왔습니다. 복음과 신앙에 대한 합리적 언어가 바로 신학입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구원의 언어를 보존하고 그 언어에 근거해 삶의 전승을 이어가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언어는 교회의 정체성을 표현합니다. 이 신앙 언어를 잘못 이해하면 교회는 권위적이 되고, 우리 신앙은 왜곡되고 맙니다.”

서 신부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정체성을 ‘성체성사의 삶’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교회라면, 또 성체를 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을 내어주고 쏟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성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듯이 ‘상호 섬김’이라고 했다.

“하느님은 자비롭고 용서하시고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상명하복의 수직적 구조가 아닌 서로 섬기는 조직이 더 복음적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서 그 시대의 신앙 언어로 서로 섬기며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순교자 집안의 후손, 사제 되다

서 신부는 8대째 신앙을 이어온 순교자 집안의 후손이다. 8대조 할아버지 서광수(1715~1786)가 가족을 데리고 서울에서 경북 문경 여우목으로 피신한 후 신앙의 자유를 얻을 때까지 4대가 이곳에서 살았다. 병인박해 때에는 서인순(시몬)과 서익순(요한), 서태순(베드로) 할아버지가 순교했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인 서상돈(아우구스티노, 1850~1913) 선생이 서 신부의 증조부다. 또 저명한 성서학자였던 고(故) 서인석(대구대교구) 신부와 사촌 간이다.

서 신부는 1934년 8월 1일 아버지 서정호와 어머니 정지자 사이의 4남 4녀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서울대 의학부 예과 2년을 마치고 사제가 되기 위해 1955년 서울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또 신부도 되고 싶었고요. 보람있는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부산 우리 집으로 피난 와 계시던 윤형중 신부님께서 의학과 신학은 둘 다 일생을 요구한다며 하나를 선택하라 하셔서 미련없이 신학교를 지원했습니다. 맏이가 의사가 될 것으로 기대하셨던 부모님은 서운한 기색이었으나 직접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대신학교 4년을 마치고 1961년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파리가톨릭대학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4년 파리 생 쉴피스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그는 수품 성구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는 요한 세례자의 말씀을 택했다. 이후 1968년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수학한 후 1969년 귀국했다.

유학시절 서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과정을 생생히 보고 들었다. 그의 스승 중 교부학자로 저명한 한 예수회 신부가 공의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학기마다 공의회 진행 과정을 상세하게 배울 수 있었다.

“희망적이었습니다. 공의회에 대한 기대가 많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교회가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있었기에 현대 사회의 적응과 쇄신을 통한 오늘날의 신앙 언어로 새로운 복음화를 추구하는 교회의 모습에 매우 기뻤습니다.”



복음대로 살 때 복음 전할 수 있어

서 신부는 귀국 후 신학교 교수로 재임하면서 신학생들에게 ‘참으로 섬기는 사제가 되라’고 한결같이 가르쳤다. “성품은 신앙을 위해 섬기는 사람이 되는 성사”임을 잊지 않고 강조했다. “몸을 내어주고 피를 쏟으신 예수님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섬기는 자가 되라”고 노 사제는 지금도 외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살 때에 비로소 교회는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므로, 교회 역시 이웃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봉사적인 자세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주교나 사제나 모두 권위를 버리고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서 신부는 성직자의 사회 참여 문제를 숙고할 것을 조언했다. 사회 참여는 자기 쇄신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 참여는 그 사회가 잘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제의를 입고 거리로 나와서 미사를 하는 것이 사회 참여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고쳐야 할 것을 고치지 않고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 사회 참여라 오해하면 이것도 그리스도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서 신부는 포털 사이트 블로그에 매 주일 강론을 게재하고 있다. 많은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이 사이트를 즐겨 찾고 있다. 그는 또 2004년 은퇴 후 부산교구 수정동성당 강당에서 봄 가을로 1주일씩 신자들을 대상으로 신앙 강좌를 열고 있다. 최근 그 결실로 「그리스도인- 그 정체성과 죽음과 희망」(분도출판사)을 출간했다. 하루 일상을 대부분 강의와 강론 원고를 준비하고 책을 읽으며 보낸다는 서공석 신부는 “그리스도 신앙이 죽은 언어가 아닌 오늘의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신앙 언어가 되도록 마지막 힘을 쏟겠다”고 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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